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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148) ▶ 받은 사명대로 살려면(02 - 요한복음 21:20-23)

다솔다윤아빠 2025. 11. 5. 23:28

* 요한복음 강해(148) 받은 사명대로 살려면(02 - 요한복음 21:20-23)

2차 대전 때! "히틀러는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갔지만, 독일교회는 이를 책망하기보다 옹호하거나 침묵"하였습니다. 이에 "1939! 미국에 있던 본회퍼는 고국에 공의를 선포하려는 사명감을 가지고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미국의 많은 독일 신학자들이 본회퍼를 만류했지만, 본회퍼의 답은" 이랬습니다. "만일 지금 내 동포와 함께 시련을 당하지 않는다면, 나는 종전 후! 독일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본회퍼는 독일 교회를 재건하려고 복음과 공의를 선포하다 39세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외모가 다르듯!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도 다" 다릅니다. 어떤 "사명은 생명을 걸어야 하지만! 반면에 어떤 사명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인은 누구나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훗날 하나님께 칭찬받음을 알고 있지만! 많은 영혼이 사명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 22절은 "주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말씀합니다. 당시 "사도 요한이 주님께 받은 사명은 베드로가 받은 사명과"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서 거꾸로 순교했고, 다른 사도들도 다 순교했지만, 요한만 장수하며 당시 이방철학으로부터 교회를" 지켰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고 들은 유일한 생존자로서! 거센 영적 도전을 이겨야" 했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사명을 받지만, 그 사명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도 "말씀과 찬양, 선교와 행정 등! 각자의 사명이 다" 다릅니다. 문제는 "사명이 다르다는 것보다! 받은 사명을 얼마나 제대로 감당하는가?"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받은 사명을 알아야 그 사명을 감당할 방법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한 번 뿐인 소중한 인생을 헛되이 허송세월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부족해도 "하나님께 받은 사명대로 헌신한 영혼에게 하늘의 상급과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요한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는지" 살펴봅시다.

 

받은 사명대로 살아가려면 주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자신처럼 주님 뒤를 따르는 요한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스스로를 만찬 석에서 주님 품에 의지하여 주님을 파는 자를 물었던 제자로 소개"했습니다. 실제로 "요한은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의 품에 의지해서 누가 주님을 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60년이 지났지만! 주님께 기대어 누웠던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환언하면 "비록 6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지금도 주님 품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요한이 주님의 은혜를 잊고 살았다면, 요한복음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민자인 "우리는 누구나 버겁고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막아주시고 열어주셔서 건강과 가족을 지킬 수 있었고, 지금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망각하고 살아가기에! 받은 사명까지도 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철저하게 기억하는 영혼만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명자로 주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보고 듣는 말씀마다 바로 깨닫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21절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자신의 사명을 들은 후! 갑자기 요한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당신이 올 때까지 요한을 머물게 해도 네가 무슨 상관이냐!"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당시 초대교회에서 이 말이 와전되어! 요한이 주님 오실 때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소문이 곳곳에 확산되어" 갔습니다.

 

당시 "이 대화는 주님과 베드로 요한, 셋이서" 나누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란 소문은 주님과 요한이 아닌 베드로가 퍼트렸던 것"입니다. 이유는 "베드로가 요한에 관해 주신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동석! 동시! 같은 목회자에게 말씀을 들어도 그 반응이 같지" 않습니다. 혹자는 "뜨거움과 간절함으로 듣지만, 혹자는 잡념에 빠져 말씀을 외면하기에! 받는 은혜와 깨달음이 찬양지차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은 "사모하고! 마음을 여는 만큼" 깊어집니다. 신앙인에게 "말씀을 깨달음은 생사의 문제이기에! 너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말씀을 깨달으면! 말씀이 내 이야기로 들리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흐렸던 것이 선명해지고, 받은 사명대로 신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가장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지만,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삶이 "바쁘고 분주해서! 말씀을 깨달음으로 받는 은혜에 관해 너무도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냄도 문제"입니다. 혹자는 "남성은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지만, 여성은 두 귀로 듣고 입으로 다 흘려보낸다." 말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깨달으면! 하늘의 지혜로 이 땅의 인생도 형통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말씀이 바른 선택과 판단을 주고, 장애물을 이길 지혜를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말씀을 깨달음에는 항상 승리가 있지만, 모두가 이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 후! "40년 광야생활에서 출애굽 1세대 모두가 사망"하였습니다.

 

이유는 "시간이 지나서 사망한 것이 아니고, 말씀과 은혜를 깨닫지 못함에" 있었습니다. 당시 "그들이 말씀을 못 듣고, 말씀이 멀리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때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때로 모세를 통해 말씀을 들었지만, 문제는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1세대는 항상 불평과 원망이 많았고, 세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에 항상 두려웠고, 우리는 메뚜기밖에 안 돼! 패배의식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시는 말씀을 깨달은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의 인생은 그들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매사에 "승승장구했고, 말씀을 더 깊이 깨닫고 더 신실해져" 갔습니다. 사람마다 "깨달음이 있고 없고는 이미 말씀이 모두에게 선포되었음을 전제로" 합니다. 결국 "두렵지만! 말씀을 깨닫는지 여부는 다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기에, 내 신앙을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어느 "추운 겨울! 예배 후 귀가 중에! 아내가 남편에게 목사님의 설교에 관하여 계속 불평을"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인간처럼 될 수 있어요? 그것이 어떻게 은혜가 되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어요!" 남편이 "이를 설명하는 중! 집에 도착했는데, 대문 앞에서 참새들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참새를 불쌍히 여겨서, 집에서 쌀을 가져다주었지만, 참새들은 두려워서 모두 도망"갔습니다. 아내도 "안타까워서! 너희가 이것을 안 먹으면 모두 굶어죽어! 소리쳤지만! 참새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더 멀리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이에 "남편이 혼잣말로! 참새에게 내 뜻을 어떻게 전하겠어? 내가 참새가 될 수도 없고!" 말했습니다. 그 때! "아내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자신에게 다가온 사랑이 깨달아지고" 믿어졌습니다. 감격한 "아내는 마침내 성육신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를 자신의 이야기로 영접"했습니다. 말씀을 "깨달음은 우리 인생을 바꾸고, 죄가 아닌 은혜의 자리로 이끌어" 줍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항상 주께서 주시는 말씀을 깨달아서, 사명으로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2. 받은 사명대로 살아가려면 우리가 눈앞만 보고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넘어진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세 번이나 말씀하며, 베드로를" 살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요한을 보고, 뜬금없이 요한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비록 주님께 사명을 받았지만, 주된 관심이 자신이 받은 사명보다 바로 지금 눈앞! 요한에게" 있었습니다. 마침내 "성령을 받은 후! 그 시각이 사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또한 "당대 사람들은 요한이 안 죽는다는 소문을 정말" 믿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더 멀리 보고 듣기보다 눈앞의 것만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눈앞의 것만 보고 들으며 살아가는 영혼이 어떻게 사명자로 살 수" 있겠어요? 물론 "사람이 멀리 보려면! 먼저 눈앞의 것을 제대로 보고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눈앞에서 보고 들은 것에 집착하고, 정체됨을 뜻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눈앞에서 보고 들은 것만을 신뢰하려" 합니다. 그러나 "눈앞에서 본 것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에, 사명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사람이 "눈앞에서 보고 들은 것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영혼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눈앞만 보고 살아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앙인은 "눈앞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22절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말씀합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며, 주께서 다시 오실 재림에 관해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재림보다! 요한이 주님의 재림까지 살 것이란 말에 더 집착"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임박한 사건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요한이 계시록을 쓸 때! 하나님께서는 재림을 간절히 사모했던 요한에게 하늘의 모습과 훗날 미래를 똑똑히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약속들이 대부분 성취되었지만, 아직 주님의 재림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재림이 "없거나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훗날 "주의 재림 때!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믿는 자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갈 것"입니다. 문제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라나타! 찬양했지만, 현대 신앙인은 재림을 허구와 고대의 신화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재림에 관해 무관심하고, 믿으려 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재림은 분명히 있고, 시시각각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결국 "재림을 불신하며 준비하지 않으면! 천국도 불신하는 것이기에! 결코 사명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2장에서 "주님은 생후 8일 만에 정결예식을 위해 성전에 올라갔고, 당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시므온을" 만났습니다. 당시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란 말씀을 듣고, 항상 경건함으로 주님의 초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는 중 "시므온은 성전에 온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깊이 감사"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시므온이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다리며,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며 경건하게" 살았을까요?

 

하나님은 "그렇게 간절하게 주님의 초림을 기다린 시므온을 높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재림은 생각지 않고! 예상치 못한 때! 홀연히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을 준비하는 영혼과 그렇지 않은 영혼이 살아가는 인생이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재림이 임했을 때! 정말 재림이 있구나! 생각하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재림은 내 생전에 또는 사후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재림의 때보다! 어떻게 재림을 준비하는가!"에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몰락은 너무도 참혹"했습니다. 코카서스 "기병들이 모스크바를 침공할 때! 이를 피한 피난 행렬에는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마차와 시종들! 사제들과 귀족들이 무려 100만이" 넘었습니다. 당시 "금은보화는 가득했지만, 먹을 것이 없었고! 영하 40도의 강추위로 수많은 영혼이 얼어 죽고 병들어" 죽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왜 강력했던 러시아가 이렇게 비참하게 패망"했을까요?

 

당시 "러시아 정교회가 사회 전체를 지배했지만, 심각하게 타락해" 있었습니다. 사제들은 "축도할 때 손가락 펴는 법! 성전 첨탑에 앉을 천사의 숫자가 얼마나 될지! 논쟁에" 빠졌습니다. 결국 "러시아의 패망은 이처럼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교회와 사제의 어리석음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도 사명을 상실한 채! 러시아 정교회와 그 사제들! 성도들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 "늦지 않았기에! 이제라도! 우리부터 눈앞이 아닌 재림 신앙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훗날 재림 때! 우리 모두가 주님의 부름을 받는 신실한 사명자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 주신 사명으로 살아가야 함을 알지만, 사명을 잃어버리고, 사명과 멀어진 채 살아왔던 적이 더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부족한 "저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연약한 우리 삶에 하나님 주신 사명이 다시금 깊이 새겨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항상 "보고 듣고, 묵상하는 말씀마다 깊은 깨달음을 주셔서! 허락하신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새기고 또 새겨서 사명자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또한 "눈앞에 펼쳐진 현실만 보지 않고, 더 멀리! 더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 주님의 재림을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 중 한 명도 받은 사명에서 곁길로 가는 영혼이 없게 하시고, 훗날 천국에서 한 명도 빠짐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혜와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번 한 주간도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에 계셔서 날마다 바른 길 보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곁에 계셔서 날마다 팔로 껴안아 지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뒤에 계셔서 못된 사람들의 나쁜 계획에서 날마다 보존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아래 계셔서 떨어지면 받아주시고, 덫에서 끄집어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안에 계셔서 슬퍼할 때에 위로하여 주시고 눈물 닦아주시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위에 계셔서 날마다 복에 복을 더 해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하나님께 받은 소중한 사명으로 살기 원하여

항상 주시는 말씀을 간절하게 들어서 깨닫고 그 은혜로 살기 원하며

눈앞이 아닌 재림의 신앙으로 살아가길 작정하는

주님의 사랑하는 백성들 머리 위에! 보혈의 공로로 값 주고 사신 새한 교회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