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성탄절 예배(231225) ▶ 당신에게 성탄은 어떤 날인가요? (히 2:14~18).
2007년 "성탄절에 최요삼 선수가 세계 복싱 기구 플라이급 1차 방어전에 성공하고 뇌사 판정을" 받았습니다. 1974년 "성탄절, 문교부가 대입 예비고사에서 실수를 인정하여, 300명을 추가로 합격"시켰습니다. 1971년 "성탄절에 대연각 호텔 화재로 164명이 사망하고 21층 건물이 전소"되었습니다. 매년 "12월 25일이 되면, 최요삼 선수 가족, 대연각 호텔 사망자 가족과 추가로 대학에 입학한 300명이 경험했던 성탄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똑같은 날이라도, 내 상황과 처지, 경험과 기억에 따라서,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탄도 "마찬가지인데, 혹자에게 성탄은 하나님과 무관하고, 세속적 의미가 가득한 날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혹자에게 성탄은 예수의 오심으로 내가 구원받은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성탄을 어떤 날로 기억하는가에 따라서 성탄의 은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2023년 성탄절은 나에게 어떤 날"입니까?
본문에서 "성탄이란 말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류 구원을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고, 성탄은 이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특히 "본문은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귀를 멸하시려고,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시려고, 우리를 붙들어 주시려고, 죄를 속량하시려고,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히브리서 수신자는 이처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오늘도 "세계 오지에서 성탄이 어떤 날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고, 성탄을 알지만, 오히려 무관심한 사람도 많고, 성탄에 하나님 은혜로 삶이 바뀌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2023년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성탄절인데, 예수께서 오신 성탄이 내 삶과 가정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내게 어떤 은혜와 영향을 주는 날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1. 성탄은 나를 살리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이 땅에서 "혈과 육을 입고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나 죽음의 권세를 가진 마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본문 15절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평생 죄의 종으로 살아갈 수도"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이 이렇게 죽음에 매여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믿는 우리를 구원하고 살리시려고, 예수께서 우리처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는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내 모든 죄와 악을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씻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성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로 죽어가는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날이기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감격스럽게 "예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성탄의 주인공인 예수가 빠지고, 내 즐거움, 내 기쁨만 찾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생명과 구원을 상징하는 날인 성탄이 세속적 즐거움에 묻혀가고" 있습니다. 저는 "중고등부 때, 성탄 이브면 밤새도록 놀고, 성탄에는 매번 늦잠을" 잤습니다. 믿지 "않았던 부모님이 성탄 이브에 교회 가는 것을 반대했지만, 항상 고집부려서 모임에" 갔습니다. 이유는 "성탄이면 여학생과 선물도 교환하고, 밤새도록 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매 성탄이면 예수는 없고, 그저 놀고 늦잠 자고, 부모님을 졸랐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우리 중에도, 과거의 저처럼 성탄의 가치와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분이 많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주님을 모르는 세상은 그럴 수도 있지만, 성도인데 성탄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고 살아감은, 큰 문제"입니다. 성탄은 "영생을 여는 시작이기에, 흥청망청 세속적 즐거움에 빠져 살아갈 날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가 성탄에도, 세속적 즐거움을 찾다가, 구원의 감동과 은혜를 잊고, 습관적으로 성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이 없다면, 누구나 죄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탄이 나를 구원한 날임을 믿는다면, 성탄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성탄은 "내가 주님을 초청한 날이 아니고, 주께서 자원하여 나를 살리려고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이에 "성탄은 내가 영적으로 다시 회복되어야 할 날"입니다. 이처럼 "성탄이 복되려면, 나부터 영적으로 살아나서,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연말마다 "성탄을 맞지만, 나부터 의도적으로 말씀과 믿음 안에서, 받은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유는 "예수가 이 땅에 오심은 등 떠밀려서 억지로 오지 않고, 의도적으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탄이 살리고 세우는 날이기에, 나부터 살리고 세우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성탄의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받은 구원을 지키려는 노력이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 9: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말합니다. 생각할수록 "사도 바울처럼 신실한 주의 종이 어떻게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위대한 사도 바울조차, 구원을 지키고, 버림받지 않으려고, 항상 의도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구원받음을 "지키려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면서, 항상 영적으로 잠들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마귀의 "목표는, 우리가 성탄을 통해 받은 구원의 감격을 의심하게 하고, 흔들어서 빼앗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데, 내가 구원을 지키기 위한 의도적 노력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스포츠에서 "챔피언이 되는 것보다 챔피언을 지키는 것, 우승하는 것보다 우승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목사가 "됨보다 목사답게 살아가는 삶, 장로가 됨보다 장로답게 살아가는 삶, 부모가 됨보다 부모답게 살아감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성탄은 "예수께서 나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 계속 연약한 나를 살리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며, 사랑과 은혜를 주시는 날"입니다. 이제 "2023년 끝자락인데, 우리가 성탄을 통해서 받은 구원을 의도적으로 지키고자 노력하며, 성탄의 의미와 가치를 바르게 깨닫는 복된 연말이 되기" 원합니다.
2. 성탄은 예수께서 죄인인 나와 공감하고 위로하시기 위해서 오신 날입니다.
본문 18절은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공생애 시작 전, 마귀의 시험 세 가지를 모두" 이겼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연약한 인간이 마귀에게 어떻게, 무슨 시험을 받는지, 경험적으로 잘" 아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가 받는 시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 아픔과 힘듦을 깊이 공감하고, 우리를 격려하고" 돕습니다. "힘들지! 많이 아프지! 섭섭하지! 나도 그랬어!"
그렇게 "주께서 나와 같은 시험과 고난을 겪으셨기에, 내 아픔과 상처를 공감하며 나를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은 "말씀 한마디로 충분히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와 공감하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창조주가 피조물과 같이 되어 주셔서, 성탄을 통해 우리가 겪는 희로애락을 모두 공감하며 함께"하십니다. 사람은 "어렵고 힘들 때, 나와 똑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의 말에 깊게 공감"합니다.
수술 전 "저는 환우를 위해 기도할 때, 안타까움은 컸지만, 간절한 마음은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제가 큰 수술을 받고 보니, 수술실로 들어가는 분의 마음을 알기에, 기도의 깊이가" 달라졌습니다. 이유는 "환우의 아픔과 두려움을 깊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연약한 인간은 책망과 정죄보다, 공감과 위로를 통해 서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타인의 아픔과 어려움에 공감보다, 무관심할 때가 더" 많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아내가 퇴근한 남편에게 '요즘 허리가 뻐근하고 아파요!' 말하자, 남편이 '내일 병원에 가봐!'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아내는 "'병원에 갈 정도로 심각하지 않아요!' 답하자, 남편이 핀잔을 주며" 말합니다. "그럼, 운동이 부족해서 그러니 운동이나 해요." 당시 "아내는 남편에게 허리를 고쳐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편의 공감과 위로, '오늘도 집안일로 고생 많았어. 수고가 많네. 정말 고마워.' 이런 따뜻한 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힘들고 아파하는 분과 공감하기보다, 내 상식과 경험으로 답만 주려" 합니다. 공감은 "헬라어 Empatheia에서 유래되었고, '외부에서 감정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타인의 감정과 열정, 고통과 함께한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공감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극대화"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며 공감하시기에, 내 삶에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희로애락이 반복되어도, 지금도 사랑으로 나와 공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감한다면서, 공감받기 원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에, 오히려 더 큰 상처와 아픔을" 줍니다. 그렇게 "사랑이 없는 공감은, 때로 공격과 비판, 정죄와 평가가 되어서, 관계를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많은 "교회와 가정이 친밀함보다 냉랭한 이유는, 공감하려 하지만, 그 안에 예수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기에 '그럴 수 있어.' 이보다 '어떻게 저럴 수 있어!' 이 마음이 더욱" 커집니다.
비록 "내가 부족해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공감의 말이 짧아도, 누군가를 살릴 수" 있습니다. 욥이 "마귀의 참소로 재산과 가족, 건강을 다 잃었을 때,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성경은 "당시 세 친구가 욥의 참담함을 보고 일주일 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말씀합니다. 이에 "세 친구는 욥의 현실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세 친구의 문제는 사랑 없는 공감으로 욥을 더 아프고 힘들게" 했습니다.
그렇게 "욥기는 세 친구가 보여준 사랑이 없는 공감을 통한 공격, 이에 대한 욥의 반론이 가득"합니다. 성탄은 "예수께서 죄인인 나를 사랑으로 공감하기 위해 오신 날이기에, 나도 주님처럼 사랑으로 공감하는 마음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사랑으로 공감하는 마음으로 살려야 할 영혼이 주변에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 내 배우자, 부모와 자녀, 가까운 믿음의 동역자가 사랑의 공감을 원할지도" 모릅니다. 주께서 "나를 공감하기 위해 오신 성탄절, 나도 매일의 삶에서 주변의 동역자부터 사랑의 공감으로 다가가는 복된 성탄이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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