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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묵상(04) -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다솔다윤아빠 2024. 8. 13. 04:00

@ 히브리서 묵상(04-220130)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3:1~6).

 

피카소의 "걸작인 황소의 머리는 평범한 자전거 좌석과 손잡이로 만들어졌고,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걸작,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은 쓸모없어 보이는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를 보면 "작품의 가치는 사용된 재료보다, 누가 그 재료를 쓰는가로 충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 손에 붙들려서 쓰임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면, 나의 삶과 미래, 능력과 재능이 가장 가치 있게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팬더믹을 겪으며, 우리는 아니고 틀린 줄 알면서,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낙담과 좌절로 소중한 삶과 시간을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보다 물질과 욕심, 자기 의와 편견에 붙잡혀서 쓰임 받을 때가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신나는 인생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붙들려서 쓰임 받는 인생"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잘 아시고 가장 선하고 바르게 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인생은 누구 손에 붙잡혀서, 어디에 쓰임 받고" 있나요? 히브리서 "1~2장은 주님을 천사와 비교했고, 본문은 주님과 모세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때 선민이 이방인과 달리 거룩하도록 율법을 전하며 쓰임" 받았습니다. 이에 "본문 2절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 신실하게 쓰임을 받았다." 말씀합니다. 또한 "본문 5절은, 모세가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 온 집에서 종으로 신실했다!" 말씀합니다.

 

모세가 "하나님 손에 붙들려서 쓰임 받은 때가 80세 이후, 인생의 황혼기"였습니다. 이를 보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기준은 젊음과 능력보다, 부족해도, 내가 얼마나 하나님 손에 굳게 붙들려서 살아가는지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마지막 주에 '주가 쓰시겠다.' 말씀하며,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하나님께서 여전히 내게도 '주가 쓰시겠다!' 말씀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딘가 무엇인가에 쓰임 받을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하나님 손에 붙들려 선하게 쓰임 받는가? 아니면 하나님 없는 악에 쓰임 받는가?"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하면, 영적인 준비가" 필요합니다. 똑같은 "인생의 황혼기에 준비된 모세와 준비 없는 아론이 어떻게 쓰임 받았는가가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힘들 때지만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며 가장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항상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인가?" 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도리, 사도, 대제사장, 하나님 온 집의 종, 하나님 집을 맡은 아들." 특히 "본문 1절은 이렇게 주님에 관해 다양한 표현을 한 이유를, 예수를 깊이 생각했기에"라고 말씀합니다. 생각하다. "카타노에이는 관심을 가지고 깊이 살피는 열정을 강조"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경을 깊이 살피고 주목하며 예수에 관해 깊이 생각했기에, 이처럼 다양한 고백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가 누구고 어떤 분인지, 깊이 깨닫고 답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더욱 힘있게 쓰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같은 장소와 시간, 같은 목회자를 통해 말씀을 들어도 예수가 누구인지 바른 고백을 가진 분과 그렇지 않은 분이 어떻게 똑같이 쓰임 받을 수" 있겠어요? 오늘 "우리는 예수에 관해 간접적, 이론적으로 알면서, 예수를 잘 알고 있다." 착각합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들었던 익숙함으로 인해, 예수를 잘 믿는다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생 예배드리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가 나에게 어떤 분인지, 내 삶을 어떻게 바꾸고, 나를 어떻게 이끄시는지, 체험과 간증이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예수가 누군지 나만의 신앙고백이 없다면, 나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악한 세상에, 고독과 운명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한 번도 세상과 운명, 고독에 내던진 적이 없고, 언제나 나와" 동행하십니다.

 

문제는 "십자가 복음을 통한 죄 사함과 구원의 확신이 정말 내 신앙고백인가에 따라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정도와 깊이가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예수는 누구이고, 나만의 신앙고백이 있다면 과연 무엇"입니까? 2018-06-23, "태국 치앙라이주 유소년 축구교실 선수들과 코치가 유명한 관광지, 탐 루엉 동굴을" 방문했습니다.

 

탐 루엉 "동굴은 태국에서 가장 긴 동굴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날따라 폭우가 쏟아지면서, 동굴 안에서 물이 급격하게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코치와 소년들은 물을 피해 무려 5Km나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마침내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소년 12명 중 11명이 불교도였고, 아둔이란 아이만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얼마 후 "모두가 극적으로 구조되었을 때, 아둔의 부모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여 남긴 신앙고백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에게 베푸신 사랑이다. 하나님은 위대한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는 분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아둔과 그 부모처럼 하나님 은혜로 구원받고 살아난 경험이 얼마나" 많겠어요? 팬더믹이 "힘들고 두렵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나를 도우신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우리는 나를 여기까지 이끄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온전히 내 것으로 고백하기보다, 아직도 희미하고 흐릿하게 알고" 살아갑니다.

 

문제는 "예수가 누구인가? 그 고백이 화려하고 신학적으로 탁월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조금 어색하고 투박해도, 내가 예수를 바로 알고 표현하는 나만의 신앙고백을" 기뻐하십니다. 신앙생활에서 "성경과 목사가 말하는 예수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내가 만나고, 내게 다가와 나를 구원하신 예수를 바르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그렇게 "나만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데,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쓰지!" 않겠어요?

 

도마는 "의심이 많았지만, 부활하신 주님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 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고백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극렬한 풀무 불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귀한 신앙고백을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셔서, 그들을 힘있게 쓰셨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각자가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드리는 체험적이고 실제적인 신앙고백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나만의 신앙고백이 넘어져 가는 내 신앙을 다시 붙들어 주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신앙고백이 있을 때, 내가 세상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크게 쓰임 받으며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주도 "예수가 누군지 나만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하나님 손에 붙들려 더 크게 쓰임 받기" 원합니다.

 

2.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항상 "지금 내 믿음이 굳건한가? 흔들리는가?" 확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6절은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말씀합니다. 본문은 "부족해도,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붙잡으면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다." 강조합니다. 힘들어도 "우리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면, 나는 악한 세상에서 작은 교회로 충분히 제구실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도전"입니다. 이를 보면 "당시 히브리서 수신자 대부분의 믿음이 굳건하지 못하고 흔들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처럼 흔들리는 신앙을 굳게 하려고 붓을 들었고, 그 도전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지 않는 육신의 질병, 물질적 피해, 심각한 스트레스와 충격으로 그 삶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흔들릴 수 있지만, 얼마나 흔들릴지, 흔들림에서 어떻게 회복되는지가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이런저런 이유로 변덕스럽고, 시시때때로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택시를 잡으려고 고생하는데, 사람들이 따따블 소리치니 택시가 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할머니가 '따따따블!' 크게 외치자, 택시가 섰고, 마침내 집에 도착하여 택시비로 10불을 내자, 기사가" 항의합니다. "따따따블 외치시고 이러시면 안 되죠!" 이에 "할머니가 '너도 나이 먹어봐,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 답했대요! 사람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은 절대로 변덕스럽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많은 분이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면 충성스럽고, 반대로 되면 거부하며 비판하고, 함부로 정죄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세상과 사람도 이처럼 변덕스러운 사람을 외면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런 영혼을 힘있게" 쓰겠어요?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보다 흔들리지 않고 얼마나 굳건한가를 보고 사람을" 쓰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건하여 흔들리지 않으려면, 모세처럼 언제나 삶의 기초를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모세가 "흔들리지 않고 굳건했던 이유는, 삶의 기초가 애굽과 가나안 문화가 아닌 하나님께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결같이 굳건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 붙잡고 헌신했기에, 하나님 집에 충성스러운 종으로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계적 "시인 롱펠로우는 백발이 성성해도 여전히 뛰어난 시를 발표했고, 제자들이 그 비결을 자주" 물었습니다. 이에 "롱펠로우가 정원에 깊이 뿌리내린 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고목에 여전히 잎이 나는 이유는 양분을 잘 섭취하기 때문이야! 나이가 들어도 계속 흔들리지 않고 배워가면 더 힘있게 일할 수 있어!" 문제는 "내 상황과 나이가 아니라, 내 삶의 기초와 뿌리를 어디에 내리는가에" 있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 삶의 이유와 능력, 자존감을 어디에서 공급받고 살아가는가로 그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뿌리내린 삶은 풍성한 영의 양식을 공급받고, 마르지 않는 샘처럼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젊고 유능해도, 그 삶의 뿌리가 세상에 내려지면, 금방 시들 수 있기에, 어떻게 힘있게 쓰임" 받겠어요? 1:3절은,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합니다.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가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면, 그 삶이 마르지 않고 풍성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힘 있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방 땅에서 억울하고 힘들었지만, 그 삶과 신앙이 언제나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굳건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믿음이 굳건하였기에 풀무 불과 사자 굴을 이겨냈고, 오늘까지도 힘있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의 "삶을 지탱했던 기초는 성공과 권력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26:3절은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말씀합니다. 바쁠수록 "더욱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말씀 앞에 서야, 우리 삶의 심지가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 악한 세상에서 나를 평강으로 이끌며 선하게 쓰실 수" 있습니다. 한주도 "세상은 너무 빨리 그리고 쉽게 변하지만, 언제나 흔들림 없는 굳건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더 크게 쓰임 받으며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