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히브리서

히브리서 묵상(06) - 내 신앙이 완고하지 않으려면.

다솔다윤아빠 2024. 8. 14. 03:41

@ 히브리서 묵상(06-220213) 내 신앙이 완고하지 않으려면(3:15~4:2).

 

어떤 "청년이 밤늦게 귀가하는데, 우물에 도깨비불이 있다며, 온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청년이 "우물 안을 보니, 정말 두 개의 파란불이 깜빡였고, 알고 보니 고양이가 우물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에 "청년이 고양이를 구하려고 별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고양이는 계속 이를 거부하며 거칠게 반항만" 했습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고양이가 죽을 수밖에 없었기에, 청년은 나무로 고양이를 때려 실신시킨 후, 겨우 뜰채로 고양이를" 구해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우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주께서 많은 은혜를 주셔도 이를 받기보다 오히려 완고하게 거부할 때가 더" 많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은혜가 크고 깊지만, 내 완고함 때문에 은혜와 멀어질 때가 더"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아닌 줄 알면서, 누군가 싫다고, 감정과 기분, 완고함 때문에 복음과 은혜를 거부"합니다. 문제는 "교회와 기독교인에게 풍성한 은혜가 지금도 넘치지만, 이를 거부하는 완고함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완고함은 "하나님 은혜와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은혜와 기회를 거부하기에 악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한두 번 완고함에 빠지면, 마침내 은혜는 물론 구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5절에서 "너희 마음에 완고하지 말라. 여기서 완고함, 스클레륀데는 히포크라테스 글에서 자주 쓰였던 의학용어로 '굳음, 거침, 뻣뻣함'을 의미하고, 마치 소가 주인을 거역하는 것처럼, 말씀과 은혜를 거부할 때 주로" 쓰였습니다.

 

특히 "완고함은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이미 다 보고도 거역하기에, 가장 악한 죄로" 여겼습니다. 본문에서 "이처럼 스클레륀데가 쓰인 이유는, 당시 히브리서 수신자의 신앙이 뻣뻣하고, 영적으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선민을 인용하면서, 하나님 백성 모두가 천국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유사해 "보여도 소신은 말씀과 같은 방향에 서 있는 거룩한 주관이지만, 완고함은 세상과 내 고집에서 비롯된 주관이기에, 그 맺는 열매가 절대로 같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서 은혜가 식어감은 팬더믹의 어려움보다 영적인 완고함이 더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완고함에 빠지지 말고 이를 이겨야 하고, 그 비결을 말씀에서 찾아가야!" 합니다. 한주도 "우리가 완고함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살펴봅시다.

내 신앙이 완고하지 않으려면, 성경의 교훈을 끊임없이 배우고 적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출애굽 선민이 무려 40년간 계속 완고하였기에,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다고" 책망합니다. 그렇게 "무려 40년간 반복되는 완고함이 깊은 불신이 되었고, 마침내 출애굽 1세대가 모두 광야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왜 출애굽 선민을 예로 들며, 히브리서의 수신자를 책망"했을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성경 지식을 전달하려는 목적보다, 수신자가 들은 말씀을 삶에서 적용하여 완고함에 빠지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는 말씀을 듣고 이를 삶에 적용하며, 출애굽 선민처럼 완고함에 빠지지 말아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받고 대하는가로 내 삶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내 지식 향상을 목적으로 들으면, 그 성경 지식이 나를 더 교만하게 하고, 영적 완고함과 자기 의로움을 가중하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 서적과 찬양 음반, 다양한 설교방송과 동영상이 마치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과거 "그 어떤 시대보다 쉽고 편하게 말씀에 관한 지식을 쌓아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이혼과 범죄, 자살과 마약중독, 도박과 음란물이 더 심각해져 가고, 황금만능주의,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두렵지만 "이런 세속적 현상은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 안,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거보다 모든 것이 다 좋아졌는데, 도대체 왜 이런 완고함이 계속" 늘어갈까요?

 

문제는 "외적인 환경은 좋아졌지만, 이에 역행하여, 말씀을 듣고 적용하며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점점 더 줄어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어서 어렴풋이 아는 것, 대충 들은 것을 잘 안다고 착각하며, 완고함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주일마다 "말씀을 듣지만, 들은 말씀을 삶에서 적용하며 살아보지 않기에, 매번 실족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 청년이 친구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하나님 말씀으로 축전을 발송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문제는 "축전에 요일 4:18절 대신 요 4:18절을 인용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결혼식은 청년이 잘못 인용한 말씀 때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참고로 "요일 4:18절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말씀하지만, 4:18절은 '네게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말씀합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말씀을 사랑한다면서, 소중히 여긴다면서, 잘 몰라서 제대로 적용하지 못함에" 있습니다.

 

매주 "말씀을 듣지만, 마음에 새기지 않기에 적용하며 살지 못하고, 그래서 은혜가 메말라가고, 마침내 완고해지고" 맙니다. 말씀은 "내 삶에서 적용할수록 더 분명해지고, 그 은혜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음도 중요하지만, 말씀대로 살아보고 적용함이 더 중요"합니다. 복음서에서 "사도들은 주께서 가시는 곳마다 항상 따라다니며 말씀을 직접 듣고, 놀라운 이적도 보았지만, 그들은 항상 '누가 큰지'" 다투었습니다.

 

많은 "말씀을 듣고, 엄청난 체험도 했지만, 제자들은 완고함에 빠져서, 주님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체험 후, 사도들은 하나님 말씀을 받았고, 삶에서 말씀대로 살아보고 적용"하였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들었고 삶으로 살아보며 적용했기에,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이적과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주신 목적은, 단지 말씀을 아는 것보다, 힘들고 어려워도 아멘으로 화답하고, 삶에서 직접 적용하며 살아가야 함에" 있습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있지만, 주님처럼 기도하면서 하나님 붙들고 살아가라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상처와 "시험으로 힘들고 아프지만, 더욱 예배 자리, 헌신과 봉사 자리를 지키라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누군가 "밉고 싫어도, 그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며 다시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들은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기에, 은혜가 메말라서 완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말씀대로 살아보면, 내 생각과 삶이 달라지고, 완고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완고함은 "구원과 영생을 막고, 이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 은혜를 막는 영적 재앙이지만, 그런데도 우리가 말씀을 삶에서 적용하며 살아가면, 충분히 완고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한주도 "주신 말씀을 듣고 적용하며 살아감으로, 완고함을 이겨내기를" 원합니다.

 

2. 내 신앙이 완고하지 않으려면, 천국에 이르도록 항상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4:1절은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말씀합니다. 말씀이 "영원한 안식을 약속하지만, 완고하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르지 못하다. 원어는 '너무 늦게 오다. 도달하지 못하다. 제외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심령이 완고해지면, 천국이 있지만, 늦어서 천국 문이 닫히고, 도달하지 못하거나, 제외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수신자 모두가 천국에 이르기를, 완고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수신자 각자는, 이 말씀을 받고, 항상 선한 싸움을 싸우며 천국에 늦지 않게, 제외되지 않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고, 독생자를 믿는 자에게만 주시는 가장 존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구원받는 믿음을 방해하며 매번 주의 백성을" 공격합니다.

 

영생은 "값없는 하나님 선물이지만, 반드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가야 영생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말하며" 살아갑니다. 믿음을 "복음에 대한 인정과 동의로 착각하여, 완고함만 더 커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마귀는 선한 싸움을 막아서고, 대충 타협하며 믿도록 우리를" 미혹합니다. 마침내 "오늘 우리는 정말 싸워야 할 선한 싸움보다, 불필요한 세속적 싸움에 더 열중하며" 살아갑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는 구원을 지키려는 선한 싸움보다, 오히려 내 이익을 위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루하루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살아갑니다. 미국에서 "Black Friday는 추수감사절 다음 날로, 1년 중 가장 큰 규모의 쇼핑 시즌"입니다. 작년 "추수감사절에, 아이의 겨울 외투를 사려고 Black Friday에 백화점에 갔다가, 정말 고생"했습니다. 저는 "1시간 이상 주차장을 돌아야 했고, 가족도 백화점 안에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매년 "Black Friday가 되면 물건을 더 싸게 사려고, 난투극과 총격전까지 벌어지고, 심지어 전기 충격기까지 챙기고, 누군가 새치기하면 한바탕 큰 싸움마저" 벌어집니다. 심중에 "어떻게 저러나! 생각하지만, 이처럼 우리는 매일 치열한 일상의 전쟁을 치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완고함을 이길 선한 싸움에는 너무도 소극적이고 무관심"합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구원은 꼭 받아야 하기에, 구원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중한 구원을 얻기 위한 선한 싸움은, 항상 교역자와 중직자의 몫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선한 싸움에서 너무도 소극적이기에, 내 신앙은 매일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가는 영혼은 완고함을 이겨내지만,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완고함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자 "하나님도 나를 구원하시려고,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죄인인 주의 백성을 살리시려고, 날마다 선한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안식일에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선한 싸움을 싸우며, 바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위해 크고 깊은 사랑을 주셨지만, 무엇보다 선한 싸움에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선한 싸움을 치열하게 싸워서 이기셨고, 그래서 약속하신 대로 말씀을 이루고, 우리 죄와 죽음을 십자가 복음과 부활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성자 하나님도 이 땅에서 매번 선한 싸움을 싸우셨다면,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더욱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지!" 않겠어요? 프랑스 "문학가 빅토르 위고는 인간의 삶에 세 가지 싸움, 자연과 싸움, 이웃과 싸움, 자신과 싸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연약한 인간이 자연과 싸워 이길 수 없고, 자연과 싸우려 함은 무모함 그 자체"입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주변 이웃과 싸우려 한다면, 오히려 완고함에 더 깊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선한 "싸움은 완고한 내가 말씀과 싸우는 힘겨운 영적 전쟁"입니다. 주변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는 영혼의 신앙은 항상 미지근"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기에,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남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다투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우리는 더욱 말씀 붙잡고, 완고한 나를 이겨나가는 선한 싸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한주도 "하나님은 물론 나를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며 완고함에 지지 않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