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히브리서

히브리서 묵상(07) - 예수를 굳게 잡을지어다.

다솔다윤아빠 2024. 8. 14. 03:42

@ 히브리서 묵상(07-220220) 예수를 굳게 잡을지어다(4:12~16).

 

지난 "2011-07-05, 서울 광진구 소재 39층 테크노마트 빌딩이 10여 분간 심하게 흔들려서, 건물 내 모든 사람이 급히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정부는 "3일간 안전 검사를 마친 후, 지반침하, 구조파손, 공진현상 중 하나가 원인일 것이다!"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채, 경제적 피해가 커지자, 어쩔 수 없이 다시 건물의 문을" 열었습니다. 문제는 "그 후에 이 건물을 찾는 사람의 불안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원인 규명도 되지 않고, 심하게 흔들렸던 고층 빌딩을" 방문하겠어요? 3:16절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해 버리리라." 말씀합니다. 핵심은 "만일 내 신앙과 삶이 이처럼 미지근하고 흔들린다면, 과연 주님께서 나를" 쓰실까요? 지금도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 성령님의 가르침과 생각나게 함이 여전히 유효하지만, 내 신앙과 삶이 시시때때로 흔들릴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게 "현대 교회와 기독교인의 영적 흔들림의 폭이 커지면서, 세상에 끼치는 영향력도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에서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굳게 잡다, 크라테오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꽉 잡다. 깊이 간직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믿음의 도리인 예수를 더욱 굳게 잡아야 함을" 도전합니다. 학자들은 "'예수를 더욱 굳게 붙잡아라.' 4:14절을 히브리서의 핵심구절로" 말합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히브리서 수신자가 예수를 믿는다면서, 복음과 주님을 굳게 붙잡지 못하고 살았음을" 증언합니다. 불행히도 "예수를 믿는다면서, 굳건하기보다 흔들리는 믿음으로 살아감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과 "하나님은 언제나 굳건하지만, 오히려 내 믿음과 생각, 선택과 결정이 계속 흔들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오래 쌓아도 무너짐은 순식간에 이루어짐을 잘 알지만, 안타깝게도, 나부터 쌓은 것을 너무 쉽게" 무너뜨립니다. 구원은 "흔들리고 어정쩡한 믿음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오래 믿었고, 직분이 있는데도 능력과 은혜를 상실함은, 우리 믿음이 굳건하기보다, 너무 자주, 그리고 쉽게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힘든 "현실이지만, 우리가 예수를 더욱 굳게 붙잡고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때를 따라 도우시기에, 예수를 더욱 굳게 잡아야 합니다.

 

본문 15~16절은 "예수는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다. 때를 따라 은혜로 돕는 분이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동정함, 원어 쉼파데오는 '똑같이 되다. 함께 어려운 일을 겪는다. 공감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지만, 우리와 같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기에, 우리 아픔과 어려움을 가장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분"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동정함의 은혜로 내가 아프고 힘들 때, 한결같이 나와 함께 아파하며 힘들어" 하십니다.

 

부족한 "나를 동정하셔서 버리지 않고, 변함없이 때를 따라" 도우십니다. 문제는 "히브리서 수신자의 믿음이 흔들린 이유는, 하나님의 동정하심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모두 다 표현하지 않지만, 누구나 자기만의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가족도 모르는, 나만의 깊은 한숨과 외로움에 눈물 흘릴 때도" 많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남들은 다 형통해 보이는데, 나만 힘들어" 보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것 같고, 나이는 들어가는데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무기력할 때도" 많습니다. 68:19절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라!" 말씀합니다. 주께서 "내 약함을 가장 잘 아시고 돕고 이해하시며, 무거운 짐을 같이 지겠다." 약속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이처럼 나를 동정하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며 붙드는가에"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의 동정과 함께함은 한계가 있지만, 우리 하나님의 동정과 도움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어떤 "전도사가 결혼 후, 사모가 가지고 온 작은 통을 보고, 호기심에 그 용도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모가 '몰라도 된다고, 절대로 열어보면 안 된다고' 간곡하게 부탁해서, 전도사가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나고, 담임목사로 사역하는 중, 목사가 신혼 때 보았던 작은 통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이를 열어" 보았습니다.

 

작은 "통에는 현금 200만 원과 달걀 3개가 있었고, 마침내 아내에게 모든 사연을 듣게" 됩니다. "당신이 전도사 때부터 들었던 설교가 졸리면 달걀을 하나씩 샀어요!" 이에 "목사가, 그러면 20년간 딱 3번만 설교 때 졸았다는 것인지 묻자, 사모가" 답했습니다. "아니요! 달걀 세 개는 최근에 샀고, 200만 원은 그동안 달걀 모은 것을 판 돈이에요!" 사람이 "나를 이해하고, 돕고 동정한다고 해도, 이는 한계가 있기에, 절대로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동정과 은혜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아픔과 눈물을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만, 나와 우리 가정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져 주실 유일한 분"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까지 동정하셨기에, 지금도 내가 평안하게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팬더믹과 버거운 이민 생활을 살아가고 있지만, 절대로 위축되지 말고, 더더욱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대충 "기분대로, 세상과 하나님 둘 다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힘을 다해서 꽉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사역 중, 다양한 위험과 죽을 고비가 많았고, 못 먹고 못 자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힘들고 어려운 고통을 몰라서, 어리석고 둔해서가 아니라, 고통보다 항상 더 큰 하나님 은혜를 붙들었기에, 굳건했던 것"입니다.

 

바울도 "힘들고 아파서 넘어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동정과 은혜가 더 컸기에, 다시 일어나서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헌신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동정하시는 은혜가 있었기에, 바울은 삶에서 풍족함과 비천함이 반복되었지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변함없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도 동정과 은혜를 주시지만, 내가 이를 깨닫고 믿지 못해서, 붙잡지 못해서, 내 신앙과 삶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잡았다가 놓기를 계속 반복하고, 아니! 세상 것을 더 붙잡으려 열심이기에 실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하나님의 동정과 은혜를 붙든다면, 내 삶은 다시 역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정과 은혜가 내 질병과 삶의 문제, 죄와 죽음의 문제까지 다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때를 살아가지만, 한결같이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동정과 은혜를 굳게 붙잡고, 날마다 믿음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말씀 붙잡고 당당하게 주님께 나아가야, 예수를 더 굳게 잡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은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나아갈 것이라! 원어는 '가까이 다가간다. 접근한다.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너무도 연약하여 항상 긍휼함이 필요하기에,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죄로 인해 약하고 부족해도, 말씀과 주님께 가까이 더 다가오고, 들어오라고" 초청합니다.

 

특히 "하나님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죄인의 영혼을 수술할 수 있기에, 더더욱 말씀 안으로 들어오라고" 강권합니다. 그래야 "내 믿음이 강해지고, 하나님께 담대함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이전보다 더 굳건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이를 해결하려고,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런데 "문제 해결을 원하면서도, 정말 문제를 해결하실 분보다, 쓸데없는 곳으로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과거 "우리는 힘든 일을 만나서 사람과 세상에서 방법을 찾고, 자료를 검색했지만,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항상 거기서 거기여서, 세상이 주는 답은 제한적이고, 효과가 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내 삶, 역사와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와 아픔을 겪을수록, 더는 고집부리지 말고, 세상을 두리번거리지 말고 더욱 주님과 말씀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아더 브리스벤의 "작품 '나비와 유충'을 보면, 그림 하단에 나비가 되지 못한 수많은 유충이 있고, 상단에는 유충에서 허물을 벗은 아름다운 나비들이 행복하게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이는 "죄와 아픔에 빠진 삶과 죄와 아픔을 벗어난 삶이 얼마나 다른지" 보여줍니다. 살면서 "우리는 유충처럼 견디기 힘든 이별과 질병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있지만, 남은 인생은 유충처럼 하단에만 갇혀 있기보다 다시 일어나서 위를 향해야 하지!" 않겠어요?

 

팬더믹의 "고통이 크지만, 그래도 우리 삶이 더는 아래와 과거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야 우리 미래가 열리지" 않겠어요? 우리가 "이처럼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 이유는, 말씀만이 내 약함과 악함, 허물과 죄를 모두 수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 말씀합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 말씀이 예리한 검으로 우리의 약함과 죄를 찔러 쪼개고 수술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우리 약함과 부족함이 말씀으로 치유되면,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온전함을 추구하며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우리를 죄의식에 빠지게 하고, 우리의 연약한 양심을 자극하면서 '못한다, 안 된다, 너는 양심도 없다. 매일 같은 죄를 범하면서 너무도 뻔뻔하지 않아?'" 속삭입니다.

 

연약한 "우리는 마귀의 음성에 속으면 점점 말씀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마침내 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주께서 십자가 보혈로 네 모든 약함과 죗값을 다 냈어! 괜찮아!'" 말씀합니다. 문제는 "성자 하나님께서 내 죗값을 다 내셨는데, 내가 당당하지 못한다면, 나는 하나님 은혜를 제대로 안 믿는 것"입니다.

 

살면서 "내 뜻대로 안 되어 힘들고 어려울수록, 나는 나를 정죄하는 마귀가 아니라, 나를 동정하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더 다가가야!" 합니다. 죄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말씀으로 수술받고 당당히 주님께 다가가서,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주님을 믿고 당당히 그 앞으로 나아가서, 주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살기등등했던 "사울이 말씀으로 수술받고, 하나님께 당당히 다가가서 사도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노예 "오네시모가 말씀으로 수술받고, 하나님과 빌레몬에게 당당히 나아가서, 선하게" 쓰였습니다. 부족해도 "나부터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내 삶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하나님께 나아갈지, 포기할지는 철저하게 내 선택과 몫"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쓰임 받았지만, 정체된 삶은 항상 악순환만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주도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서 굳건한 신앙으로 승리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