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히브리서

히브리서 묵상(08) - 이전과 달라져야 합니다.

다솔다윤아빠 2024. 8. 14. 03:43

@ 히브리서 묵상(08-220227) 이전과 달라져야 합니다(5:7~14).

 

성경에 "등장하는 사울과 마가 요한을 살펴보면, 공통점과 함께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사울과 마가 요한이, 성경에 처음 등장할 때와 비교하여 시간이 갈수록 많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차이점은, 처음과 달라졌는데, 그 달라짐의 방향이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사울은 "처음에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 때, 겸손하고 신실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순종과 이기심, 시기와 질투에 빠져 마음대로 살았고, 신접한 여인까지" 찾았습니다.

 

반면에 "마가 요한은 처음에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한 사역에서 중도 포기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신실하게 달라져서 마가복음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생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고, 조금씩 변하고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누구나 나이 들수록 외모와 생각, 가치관이 계속 달라지는데, 문제는 선하고 신실하게 달라짐과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게 달라짐, 그 달라짐의 방향성이 중요한데, 지금 내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앞으로 "내 신앙과 인생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본문은 "주님의 공생애 모습과 히브리서 수신자의 모습이 너무도 달랐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공생애 중, 계속 깊어지고 더욱 능력있게 달라졌지만, 히브리서 수신자는 처음 복음을 들을 때부터 달라지지 않았고, 계속 말씀의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영적으로 단단한 것보다 젖을 먹어야 했고, 선한 분별력도 부족했고, 더 많은 것을 배워가야!" 했습니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본서의 수신자가 이전과 달라지기를 원하며, 본문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13:32절은 "겨자씨는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말씀합니다. 천국은 "정체된 개념이 아니라, 발전하며 깊어지고, 나아지고 선하게 달라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믿는 우리 믿음과 삶도, 천국처럼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기보다, 선하고 신실하게 달라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선하게 달라지기보다 정체된 삶에 만족하여" 살아갑니다. 여전히 "팬더믹이 힘들지만,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을 맞이하며 내 신앙이 이전과 달라져야 하고, 이전보다 더 영적으로 깊어져야 하지!" 않겠어요? 한주도 "우리가 이전과 달리 선하고 신실하게 달라지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우리가 이전보다 더 신실하게 달라지려면, 우리 기도가 더 뜨겁고 간절해져야 합니다.

 

본문 7절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였다!" 말씀합니다. 원어를 "직역하면, 주님께서 요란하도록, 시끄럽도록 크게 울면서, 부르짖으면서 기도하셨다!" 말씀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2:44절은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했다고" 표현했습니다.

 

현대 "의학은 주님의 모세혈관이 파열되어 흐르는 땀에 피가 함께 섞인 것으로 해석"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개인적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소명에 순종하기 위해 너무도 간절"했습니다. 33:3절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말씀합니다. 간절한 "기도에 응답이 있고, 하늘의 비밀이 열리고, 나태했던 우리 신앙을 달라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최근 "어떤 목사가 기독교를 기도교라고 말했는데, 이는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중요하고 힘 있는 약속, 기도의 능력을 잃은 채" 살아갑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의 뜨거웠던 기도를 잃어버렸고, 심지어 기억조차 못 하고" 살아갑니다. 이유는 "그만큼 간절한 원함이 없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함도 없고,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함도 없기에, 오히려 간절히 기도하는 영혼을 보면, 비판도 서슴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기도의 태도가 달라졌기에, 간절한 기도의 능력, 눈물의 기도를 잃어버렸고, 마침내 악순환만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올해 "103주기인 삼일절은, 팬더믹을 통과하는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과 가치가 참으로" 큽니다. 우리는 "1919년 삼일 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 서명자 33명 중 16인이 기독교인이었음을 잘" 압니다.

 

여러분은 "민족대표로 헌신한 기독교인 16인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후, 삼일 운동에 참여했음을" 아세요? 특히 "신석구 목사는, 독립선언서 서명을 위해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 중,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참석을" 결정했습니다. "5천 년 전해 내려오던 강토를 내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이를 회복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길선주 "목사도 기도하는 중, 고국을 구원하라는 음성을 듣고, 삼일 운동에" 참석했습니다.

 

비록 "당시 인구 중, 기독교인이 2%도 안 되었지만, 이들의 간절한 기도로 역사의 흐름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이고, 시대와 역사, 사회와 현실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의 선한 응답이 있고,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 있지만, 간절하게 기도하는 영혼은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삼일 운동 "때보다 교회마다 출석 교인은 많이 늘어났지만, 간절한 기도는 점점 식어가고" 있습니다.

 

팬더믹 중 "3번째 사순절을 맞이하기에, 지금은 우리 기도가 더 간절하고 뜨거워야 할 때"입니다. 통상적으로 "많은 분이 처음에는 사순절 특새 참석을 결심하지만, 중간에 시들해지고, 마지막 한주 정도 남으면, 다시 뜨거워질 때가" 많습니다. 지금 "내가 겪는 아픔과 어려움, 상처와 낙담은 사람과 세상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작정하고 사순절에 기도하면서 내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 기도를 포기하는 삶보다, 다시 기도를 회복하고, 다시 기도의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싫어서, 유대인 몰살 정책을 세우고, 이 소식이 에스더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당시 "에스더는 동족의 아픔을 듣고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하고, 금식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동족 모두에게 사흘간 금식하며 기도를 부탁했다면, 에스더 본인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에스더와 유대인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핍박받는 삶에서 세상을 주도하는 위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올해 "사순절에 무엇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깊이, 눈물의 질과 내용이 달라지기" 원합니다. 그렇게 "내 기도의 깊이가 달라지면, 내 삶에 임하는 은혜로 세상과 팬더믹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한주도 "간절한 기도로 내 삶이 신실하고 선하게 달라져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며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우리가 이전보다 더 신실하게 달라지려면, 우리가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본문 11절은 "히브리서 수신자에게, 너희가 듣는 것에 둔하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둔하다 노드로이는 이해력이 둔할 때, 잘 잊어버릴 때, 몸이 마비되어 돌처럼 무감각하여 잘 움직이지 않을 때, 주로" 쓰였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하며 새 생명을 주셨지만, 그 마음이 너무 둔하고 돌처럼 강퍅해서,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는 책망"입니다. 그래서 "본서의 수신자는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갓난아이처럼 젖을 먹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본문 14절은, 지각을 사용하지 못하고, 선악조차 분별하지 못한다!" 책망합니다. 삼일 운동 때 "한국교회의 믿음은 지금 우리와 많이" 달랐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와 비교하여 기도의 깊이, 말씀에 대한 갈급함, 우선순위와 생활방식, 순종의 질이 너무" 달랐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말씀을 계속 듣고 자라고 성장해서, 그 삶이 선하게 달라졌지만,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자라기보다, 오히려 점점 미숙함에 깊이 빠져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자라지 못하고, 달라지지 않으면서도, 전혀 불편함과 문제의식조차" 없습니다. 부끄러움도 "없고, 심지어, 나는 잘 하고 있다고, 끝도 없는 자기 의로움에 빠져, 하나님 영광을 가리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달라지고 자라가려면, 적당한 수준을 넘어 최선을 다하여, 힘들어도 온전한 변화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달라지려면, 항상 온전하려고 노력해야 하기에, 성경 곳곳에서 온전함을" 강조합니다.

 

5:48절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너희도 온전하라. 17:1절에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8:13절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말씀합니다. 물론 "죄인인 인간이 절대로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죄인인 인간이 온전하려고 노력할수록, 우리는 더더욱 자라갈 수 있고, 계속 선하게 달라져 갈 수" 있습니다. 란스 페브너는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려면 계속 자라가야 한다고" 도전합니다.

 

우리가 "배우자에게, 나는 당신에게 85%만 성실하겠다 말한다면, 그 반응이" 어떨까요? 배우자라면 "누구나 100%가 아닌 85%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엄마는 "멀리 있던 자녀가 돌아오면, 식사 메뉴를 다르게" 준비합니다. 남편이 "말은 안 해도, 이를 보고 조금은 섭섭하지!" 않겠어요? 문제는 "성실하지 않은 15%에 미혹과 시험, 불화가 틈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이 85%만 하나님을 향한다면, 어떻게 더 자라갈 수" 있겠어요?

 

연약한 "인간은 100%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바르게 헌신할 수 있고, 더욱 자라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은, 말씀에 초보가 되지 말라." 명령합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자라기 원하고, 달라지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우리 삶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말씀의 소중함과 능력을 잘 모르기에, 계속 말씀의 초보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정체되어" 살아갑니다.

 

딤후서 3:16~17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성령 체험 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말씀을 붙잡았기에 더 자라서, 이전과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밧세바를 "범했던 다윗이 다시 말씀을 붙잡고, 온전하려고 노력하였을 때, 그 삶이 달라지고 더욱" 자라갔습니다.

 

여호수아가 "말씀 붙잡고 항상 온전하려고 노력했을 때, 더욱 자라서 모세의 공백을 메꾸고, 선민을 가나안으로" 이끌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나를 온전함으로 이끌고, 자라고 성장하도록 길을 열어주기에, 기독교인인 우리는 무조건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매년 반복되는 사순절을 통해, 우리가 다시 말씀을 붙잡고 이전과 달라져서 더 자라기 원하시는데, 우리가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는가로 그 결과가 달라질 것"입니다.

 

올해 "사순절을 통해, 혹자는 더 자랄 것이고, 혹자는 여전히 영적 제자리걸음을 반복할 것"입니다. 금년 "사순절 특새는 월~토요일까지 매일 '다시 일어나 앞으로!' 주제로 아브라함을 묵상해 갈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주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란 주제로 매일 저녁 온라인 특별 집회를 통해 말씀의 은혜를 나눌 것"입니다. 2022"사순절을 통해서 더더욱 자라고 성장해서 이전보다 더 신실하게 달라지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