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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묵상(15) - 미쁜 삶, 인정받는 삶.

다솔다윤아빠 2024. 8. 14. 03:48

@ 히브리서 묵상(15-220522) 미쁜 삶, 인정받는 삶(10:19~25).

 

한국은 "국회의원을 풍자한 유머가 많은데, 두 가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어떤 "취객이 벽에 붙은 국회의원 선거용 포스터를 보고, 경찰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붙어있는 사람들은 무슨 나쁜 짓을 했죠?" 경찰이 "'이는 범죄자 사진이 아니라 선거용 포스터예요!' 말하자, 취객이 이렇게" 답했답니다. "! 앞으로 나쁜 짓을 할 놈들이군요!" 한강에 "국회의원과 여성이 빠졌는데, 구조대원이 국회의원을 먼저 건져내자, 이를 본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국회의원만 건지면 여성은 어떻게?" 이에 "구조대원이, 국회의원을 그대로 두면 한강이 오염돼서!" 답했답니다. 씁쓸하지만 "국회의원이 세상에 신뢰를 주었다면, 어떻게 이런 풍자와 조롱이" 생겼겠어요? 여기서 "믿음을 준다는 것은 듣고 접할수록 마음이 놓이고, 든든하고, 무엇을 해도 항상 신뢰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과 신뢰를 주기보다 오히려 불안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께서 믿을 만하고, 한결같은 신뢰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교회 되고, 성도가 성도 되려면, 무엇보다 세상에 신뢰, 곧 미쁨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23절은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말씀합니다. 여기서 "미쁘다, 피스티스는 '믿고 신뢰할 만하다.' 신약에서 총 67회 등장하는데, 대부분이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은 항상 약속을 지키고, 한결같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기에 미쁘시다." 말씀합니다.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께서 이처럼 미쁘시기에, 그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도 미뻐야 한다." 도전합니다. 그렇게 "본문은 미쁘신 하나님께서 휘장을 찢어서 생명 길을 열어주시고, 죄 씻음의 은혜를 주셨지만, 본문의 수신자는 그 언행과 삶의 태도가 미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상과 불신자는 교회와 기독교인을 얼마나 미쁘게" 볼까요?

 

지금 "우리 교회와 나는 가정과 직장, 세상과 관계에서 얼마나 미쁜 삶, 인정받는 삶을" 살아갈까요? 여전히 "팬더믹과 전쟁의 여파가 크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미쁜 삶, 신뢰를 주며 살아가라." 도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미쁘심을 닮아, 세상과 사람들에게 미쁜 삶, 인정받는 삶을 살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우리가 미쁜 삶을 살려면,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길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20절은 "미쁘신 하나님은 휘장을 찢고 우리에게 새롭고 살길을 열어주셨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새롭다, 원어는 '방금 잡아서 신선한, 새롭게 만들어진'이란 뜻이고, 살다는 '계속해서 살아 있는'이란 뜻"입니다. 이처럼 "미쁘신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에게 가장 새롭고 계속 살아 있는 길을 보여주고" 열어주셨습니다. 이에 "죄인인 인간이 미쁜 삶을 살아가려면,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가장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을 따라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서 수신자는 오히려 정욕과 죄에 빠져 하나님보다 세상을 따라서 살아갈 때가 더" 많았습니다. 마침내 "서로 돌아보며 사랑하지 못했고, 모임이 사라지며 미쁜 삶과 점점" 멀어졌습니다. 과거 "많은 이민자가 공항에서 처음 마중 나온 사람을 따라서 직업을" 정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누구와 무엇을 따르고, 어떤 길을 따라가는가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에 "당연히 바른길을 따라가면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하고 그릇된 길을 따라가면, 누구나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14:6절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생명과 구원의 길, 예수를 뜻"합니다.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미쁜 삶, 인정받으며 살아가려면 새롭게 살길인 예수만 따라가야 하는데, 현실은 주님보다 세상을 더 따라가기에 점점 신뢰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안 늦었기에,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따라가는 대상을 바꾸어서, 세상과 사람보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새롭게 살길을 따라간다면, 우리 삶이 점점 더 큰 신뢰를 얻지!" 않겠어요?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으로, 세상을 따라서 살았던 매춘부"였습니다. 그런데 "라합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생명을 걸고 따라갈 대상을 바꾸겠다고" 결단했습니다. 비록 "이방인 매춘부였지만, 새롭고 살길, 하나님만 따라서 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지금까지 어떤 존재인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보다 지금부터 내가 누구를 바라보고, 어떤 길을 선택하여 따라갈 것인가에 따라서 내 미래가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열어주신 새롭게 살길을 따라가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가장 미쁘고, 가장 새롭고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첨단 과학은 많은 것을 편하게 해 주었지만, 절대로 온전하지 않고 항상 한계가 있고 변화무쌍"합니다.

 

그러나 "14: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그 끝에는 항상 생명과 미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금요예배 때 '광야를 지나며'를 자주 찬양했는데,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고,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에 서 있네." 이 찬양은 "인간이 얼마나 약한지, 누구를 따라서 살아갈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멀어진 광야에서 방황하고 아파한 적이 심히" 많습니다.

 

특히 "팬더믹과 전쟁의 아픔을 겪으며, 우리는 지금도 척박한 광야의 길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이 다가올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울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질병, 경제적 어려움, 관계의 파괴, 불안과 두려움 등,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오직 성령님께서 주님만이 내 도움, 내 빛이요 친구가 되신다고 말씀하며, 새로운 길을" 보여주십니다.

 

모세는 "29:4절에서, (출애굽 2세대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광야처럼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시고 허락하셔야, 내 삶이 다시 미쁜 삶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한주도 "성령께서 열어주시는 새롭고 살길을 따라가며, 미쁜 삶을 회복하여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우리가 미쁜 삶을 살아가려면, 날마다 영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본문 22절은 "우리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말씀합니다. 여기서 "참 마음은 '실제의, 진짜의'라는 의미이고, 온전하다는 '충만하다. 가득하다'라는 뜻으로, 우리 마음과 믿음에 무엇을 가득 채우며 살아가야 할지" 도전합니다. 문제는 "인간은 절대로 자연스럽게, 갑자기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쁘신 하나님을 따라가며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지도록 끊임없이 자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계속 자라가야, 서로 돌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할 수 있고, 신실한 모임을 만들어감으로 더욱 미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과 지식,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아가지만, 항상 영적인 굶주림에" 허덕입니다. 이유는 "세상과 주변은 매일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변해가는데, 나는 항상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변에 많은 교회가 있지만, 자라고 성장하기보다, 정체되고 줄어드는 교회가 더" 많습니다.

 

또한 "많은 기독교인이 자라고 성장하기보다, 제자리걸음을" 반복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고 성장하지 않기에, 점점 미쁜 삶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레너드 스윗은 "현대 교회를 네 종류로" 설명합니다. (1) "박물관 교회(Museum Church)는 생명과 열정, 기도와 헌신, 예배와 찬양을 전부 잃고 형식만 남은 교회"입니다.

 

(2) "현상유지형 교회(Maintenance Church)는 더는 부흥과 성장, 도전 없이, 그저 현상유지에만 급급"합니다. (3) "목회적 교회(Ministry Church)는 교회의 사명과 책임을 잃어버리고, 그저 출석 교인만 근근이 관리"합니다. (4) "선교적 교회(Mission Church)는 교회의 본질인 복음 전파와 자녀 양육, 섬김/구제/예배가 살아 있는 역동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네 가지 교회 유형은 기독교인의 영적 유형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과연 "미쁘신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내가 어떤 유형에 속하기를" 원하실까요? 실제로 "영적으로 더는 자라고 성장하지 않으면, 미쁜 삶, 인정받는 삶에서 점점 멀어진다면, 우리 각자와 한 소망 교회도 박물관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나부터 '여기가 좋사오니' 정체되지 말고, 영적으로 계속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영적으로 자라고 성장해서 미쁜 삶이 되려면, 넘어지고 실패하여도 항상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본서 "수신자 중 일부는 악한 양심으로 모이기를 폐하는 미혹에 빠져 있었는데, 이를 반드시 이겨내야!" 했습니다. 다행히 "영적 수렁과 미혹에서 다시 일어나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기에, 그들은 영적으로 자라고 성장해서, 미쁘게 바뀌어 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이유는, 상처와 시험으로 실족하여 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 말에 귀 기울여서 실족할 때가" 많습니다.

 

말씀보다 "사람의 무책임한 몇 마디 말에 상처받아, 믿음까지 저버리고 교회를" 떠납니다. 문제는 "나를 책임지지도 못하는 주변 사람의 몇 마디 말에 상처받아 영생을 포기한다면, 도대체 사람과 하나님 중 누구를 믿으며 살아온 것"입니까? 물론 "인간이기에 시험과 상처, 낙담과 좌절이 항상 있지만, 우리가 다시 미쁜 삶,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려면, 힘을 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성령님의 은혜로 상처와 실족을 이겨내고 다시 한번 일어나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선민에게 바벨론에 항복해야 살 수 있다고 권유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게다가 "선민은 과거의 범죄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무죄한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가두고, 진흙 구덩이에서 굶주리게 하며, 엄청나게 핍박"했습니다. 그래도 "20:9절은,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고백합니다.

 

예레미야는 "너무 억울했지만,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났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왜 내게 이런 일이' 한탄은 누구나 하지만, 지금은 다시 힘을 내서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문제는 "힘들다고 넘어져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다시 일어나면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시고, 나를 영적으로 자라게 하시고, 미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한주도 "어렵지만, 다시 용기를 내서 일어나고, 멈춤보다 자라고 성장해서 미쁜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