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히브리서

히브리서 묵상(13) - 눈높이 사랑을 주셨기에.

다솔다윤아빠 2024. 8. 14. 03:47

@ 히브리서 묵상(13-220410) 눈높이 사랑을 주셨기에(9:11~15).

 

박물관에서 "한 남성이 쪼그려 앉아서 작품을 보자, 수위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남성은 "'내일이면 알 수 있다!' 답하고, 다음 날, 유치원 아이들을 인솔하여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수위는 "그 남성이 쪼그려 앉아서 아이들에게 작품을 자세히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전날에 가졌던 궁금증을 풀 수" 있었습니다. 이는 "눈높이 교육을 처음 주장한 미국의 교육학자 조지 피버디 일화로, 피버디는 눈높이 교육의 세 가지 요소를 이렇게" 말합니다.

 

"수식어를 많이 쓰지 말고 짧게 말하라. 어려운 용어를 쓰지 말라. 한 번에 많은 것을 가르치려 하지 말라." 1: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예수께서 우리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셨다." 말씀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눈높이 사랑은 인간을 향한 최고의 존중이자 배려"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눈높이 사랑보다 자기 방식과 고집이 더 강해서, 세대 간 갈등이 커지고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눈높이 사랑으로 구원받았기에, 우리도 반드시 눈높이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배자가 직접 짐승을 잡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과 고기를 씻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예배자가 잡은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고기와 내장을 태우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놀랍게도 "구약의 제사 방식을 명하신 주님께서, 제정하신 제사 방식 그대로, 직접 제물이 되어, 당신의 전부를" 드렸습니다. 주님은 "예배의 주관자이기에,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선민에게 명하신 대로, 유대인이 이해하도록, 눈높이를 맞추셔서, 당신 전부를 드려서, 죄 사함의 은혜,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깊고 큰 눈높이 사랑이 오늘 우리를 죽음과 죄에서 구원한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종려 주일"입니다. 종려 주일도 "주님께서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지만,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셔서, 일부러 어린 나귀를 타 주셨던 주일"입니다. 또한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은 더 깊은 주님의 눈높이 사랑, 십자가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우리가 "종려 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주님의 눈높이 사랑을 받았기에 어떻게 살아갈지!" 살펴봅시다.

 

눈높이 사랑을 주셨기에, 세상 그 무엇, 누구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14절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말씀합니다. 본문은 "주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신 이유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이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섬기다, 라트류오는 주님의 피로 정결하게 된 하나님 백성이 철저하게 살아계신 하나님만 섬겨야 함을" 강조합니다.

 

당시 "많은 영혼이 죽은 행실, 배교에 빠졌기에, 본문은 더욱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살아있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본문 "수신자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당신 전부를 주셔서 구원받았기에, 그 행실과 삶이 살아있어야!" 했습니다. 이에 "오늘 나부터 전부를 주신 주님의 눈높이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잘 모르기에, 삶에서 당하는 낙심과 좌절에 빠져 실족할 때가" 많습니다.

 

부족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 삶이 왜 달라지지!" 않겠어요? 무엇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새것을 보고 듣게 하시고, 더 나은 은혜와 영생을 주시는데, 어떻게" 실족하겠어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전부를 주신 눈높이 사랑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는데, 지금 나는 세상과 살아계신 하나님 중, 누구를 더 섬기며" 살아가세요? 2세기의 "로마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며,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사람을 무신론자로 처형"했습니다.

 

당시 "요한 사도의 제자였던 폴리캅은 무신론을 당시와 전혀 다른 개념으로 정의"했습니다. "진짜 무신론자는 인간인 로마 황제를 믿는 너희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사람을 믿음이 바로 무신론이다!" 당시 "서머나 총독은 폴리캅에게 예수를 저주하고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자, 폴리캅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86년간 하나님을 섬겼지만, 하나님은 내게 한 번도 서운하게 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왕을 부인할 수 있겠나!"

 

오늘의 "비극은 정말 믿고 섬겨야 할 대상보다, 오히려 믿지 말아야 할 대상을 더 섬기는 것"입니다. 매사에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과학과 물질, 명예와 자존심, 유행과 상식, 건강과 자녀를 더 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눈높이 사랑으로 구원받은 나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르게 믿어야 우리 삶과 가정, 교회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오늘날 많은 영혼이 자신이 무엇을 믿고 살아갈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무관한 것을 섬겨서 망하고 넘어짐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으면서도, 여전히 헛것만 섬기며" 살아갑니다. 비록 "세상이 힘들지만, 정말 믿고 섬겨야 할 대상을 바르게 결정함은 생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선민이 "400년 만에 살아계신 하나님만 신뢰하며 출애굽기, 거룩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선민 중 누구도 가나안을 직접 보지 못했고, 광야에서 물이 떨어질 수 있고, 전쟁의 위협이 있고, 척박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선민이 살아계신 하나님만 섬기며 앞으로 나아갔을 때, 홍해가 갈라지며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잃어버리면서 분열과 다툼, 원망과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마침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잃어버린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그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팬더믹과 "전쟁의 여파가 클수록, 세상의 공격이 집요할수록, 우리는 더더욱 살아계신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세상은 "살아계신 하나님만 섬기는 삶을 '답답하다, 고루하다. 편협하다. 하나님은 없다.' 비판해도, 하나님만 섬기는 삶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살아계신 하나님만 믿고 섬길 때, 시작과 과정 그 끝이 선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에게 가장 좋고 선한 것으로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종려 주일은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이미 다 알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만 섬기고 순종하며 올라가신 믿음의 여정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믿음의 길, 살아계신 하나님만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에게 가장 온전한 답"입니다. 주중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되기에, 우리가 눈높이 사랑을 받은 주의 백성답게, 내 신앙을 깊이 점검하고, 살아계신 하나님만 섬기며 승리하는 한주 되기" 원합니다.

 

2. 눈높이 사랑을 주셨기에, 항상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율법에 따라 끊임없이 염소와 양의 피를 제단에 드리며, 예배자의 죄 사함을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단번에 당신을 드려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도록 길을" 여셨습니다. 특히 "본문 14절은, 이처럼 주님께서 전부를 드림이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았다!" 말씀합니다. 실제로 "성경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헌신하셨고, 성령으로 부활하셨다."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셨던 주님의 눈높이 사랑으로 구원받았기에,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성령님과 관련된 단어에 꽤 익숙하지만, 현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삶은 그 시작과 과정, 결과까지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눈높이 사랑이 보이고 나타나야!" 합니다. 고전 14:33 절은 "하나님은 무질서가 아닌 화평의 하나님이다!"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했지만, 어떤 일이 무질서하게 되고 화평함이 깨진다면,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역이 될 수" 없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하게 한다면, 이 또한 성령의 사역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삶은 내 이익과 명예보다, 항상 철저하게 하나님 영광이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 자기 뜻과 의지를 관철하려고 성령을 이용한다면, 이는 참으로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가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하셨죠? 삼각산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서해에 빠질지어다!" 그런데 "주님께서 침묵하시자, 목사가 그 이유를 물었고, 주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삼각산을 서해에 빠지게 해서 뭘 하려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삶은 내가 빠져야 하고, 철저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나야 하기에,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들어도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야,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수 있고, 그래야 새로운 미래가 열릴 수" 있습니다. 스왈론 "선교사가 안악의 유명한 깡패, 김익두에게 전도지를 주자, 그 자리에서 전도지로 코를" 풀었습니다. 이에 "스왈론 선교사가 김익두에게 '청년! 전도지로 코 풀면 코가 썩어!' 경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김익두가 선교사의 말로 깊이 고민하는 중,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기까지 신약을 100번 읽으며,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 세례도" 체험했습니다. 훗날 "성령으로 새롭게 된 김익두 목사를 통해, 무려 28만 명이 복음을 영접했고, 만 명이 넘는 영혼의 질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역사는 "김익두가 이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역했던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새벽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삶, 매일 신구약 2장씩 읽는 삶,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는 삶." 모두가 "싫어하고 거부했던 김익두가 이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았기에, 하나님은 왈패를 위대한 사역자로 바꾸어" 쓰셨습니다. 기독교인의 "가치는 직분과 믿은 연수, 세상의 지위,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은 주님을 닮아가는 삶,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삶으로, 그 능력과 가치, 영향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았기에, 소아시아와 유럽을 복음화했고, 베드로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았기에, 많은 영혼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았기에, 강퍅했던 선민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일어난 생명과 구원의 역사에는 항상 철저하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았던 영혼의 발자취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누구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 악한 세상을 이겨내려고 계획"하세요?

 

분명한 것은 "나 혼자, 내 지혜와 계획, 능력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없기에,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성령으로 말미암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성령으로 말미암는 삶이 정답이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은 "철저하게 내 위주, 세상의 상식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할 거룩한 절기"입니다. 한주도 "더욱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서, 주님의 눈높이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