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히브리서

히브리서 묵상(11) - 가장 든든한 주인이 계시기에.

다솔다윤아빠 2024. 8. 14. 03:45

@ 히브리서 묵상(11-220320) 가장 든든한 주인이 계시기에(7:22~28).

 

과거 "여행 중, 기내 복도에서 밝게 웃으며 춤추고 노래하는 어떤 여자아이를 보았는데, 아이의 재롱과 행동이 지루한 여행길에 작은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명랑하던 아이가, 갑자기 기류로 비행기가 흔들리자, 쏜살같이 엄마 품에" 안겼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광경을 보면서, 제가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류로 비행기가 흔들리듯, 힘들고 어려운 인생길에서, 내가 달려가서 안길 품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사람 "()자는, 인간은 홀로 서 있을 수 없고, 타인을 의지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인간이 "이처럼 누군가를 의지해야 한다면, 과연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삶이 버겁고 힘들어서 흔들릴 때, 달려가서 안길 분이" 있으세요? 기독교인의 "특권은 삶이 어려울 때, 피하고 안길 수 있는 든든한 반석이 함께하심에"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어떻게 이 땅의 삶을 사셨는지, 다양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구체적으로 "본문은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다(22), 주님은 영원히 계시는 분이다(24), 항상 살아계셔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다(25), 거룩하셔서 악과 더러움이 없다.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다(26), 우리를 위해 단번에 당신의 전부를 드린 진정한 대제사장이다(27)!" 말씀합니다. 요약해 보면, "주님은 이 땅에서 세워진 대제사장과" 달랐습니다.

 

나아가서 "성자 하나님으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당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신실하게 최선을 다해 감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왜 이처럼 주님의 사역과 활동, 온전하심을 자세하게 설명"했을까요? 이유는 "본서 수신자가 든든한 주님을 이전보다 더 깊이 알아가고, 더 굳게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히브리서 수신자의 삶이 든든하기보다 요동하고 흔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21:25절은 "그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말씀합니다. 현대는 "사사 시대처럼, 든든한 반석을 신뢰하기보다 자기 소견대로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자기 소견대로 살아서 실족이 많았다면, 이제부터라도 의지할 대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순절은 "내가 의지하고 신뢰하는 대상을 바꾸어야 하는 절기인데, 든든한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시다.

 

든든한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주님 붙잡고 내 삶을 선하게 바꾸어가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주님을 깊이 알아가면, 그 삶이 과거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갈리지 않고 영원하다. 거룩하고 악과 더러움이 없다. 단번에 당신을 드려 우리 죄를 사하셨다.'" 말합니다. 여기서 "본문이 왜 주님의 영원하심, 거룩하고 흠 없으심을 강조"할까요? 이는 "주님에 관한 신학적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우리가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며, 그 앎으로 삶을 바꾸어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든든한 주님을 바로 알고 굳게 붙잡아서, 눈앞의 일시적인 것보다 영원함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반석처럼 든든한 주님을 신뢰하고, 더는 더러운 죄악이 아니라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기독교인은, 그 삶이 정체되지 않고, 계속 자라가고 거룩하게 바꾸어가야!" 갑니다. 우리가 "예배와 말씀, 기도와 찬양으로 살아가야 할 진짜 목적은, 내 삶을 이전과 달리 선하게 바꾸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나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잘 안 바뀌기에, 여전히 죄에 빠져" 살아갑니다. 어떤 "남성이 오랫동안 절에 다니다가, 복음을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된 후, 교회를 방문해서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안에 주지 목사님 계시나요?"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을 믿고, 기도하며 봉사하고, 직분도 있지만, 잘 바뀌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래 믿을수록 아집과 자기 의가 더 깊어지고, 굳은 완고함 때문에 복음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나 "죄인인 내가 혼자 내 짐을 질 수 없기에, 넘어지면 홀로 일어날 수 없기에, 죄와 죽음을 이기고 구원받으려면, 우리는 성령의 은혜, 물과 피로 거듭나야!" 합니다. 문제는 "변화는 시간이 지난다고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기에, 나를 바꾸려는 의지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전보다 "더 잘 믿어서 신실하고 거룩해지려면, 계속 바꾸어가야!" 합니다. 솔개는 "태어난 지 약 40년이 되면 깃털이 무거워져서, 하늘 높이 날기가 점점 힘들어"집니다.

 

게다가 "부리와 발톱도 굽고 무디어져서, 사냥도 할 수 없게 되는데, 이때 변화를 위한 솔개의 노력과 선택이" 필요합니다. 먼저 "솔개는 자기 부리를 돌이나 나무에 부딪혀서 빼고, 새 부리가 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새로 난 부리로 자기 발톱을 일일이 쪼아 하나씩 뽑아내고, 그 후 날개 깃털을 일일이 뽑아 새 깃털이 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솔개는 자기 부리와 발톱, 깃털을 새롭게 바꾸면, 다시 30년을 더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바꾸어가야 함을 잘 알면서도, 더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면서도, '여기가 좋사오니' 현실에 더 안주"합니다. 그렇게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에, 발전과 성장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연약한 "인간은 내 의지로 나를 바꾸기가 쉽지 않기에, 나부터 더욱 든든한 주님께 묻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나를 바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나를 바꾸려고 할 때, 든든한 주께서 한결같이 나를 위해 기도하시며, 내게 새 힘을" 주십니다.

 

힘들어도 "나를 바꾸려고 할 때, 든든한 주께서 내 죄를 사하시고, 날마다 더 나아지고 마침내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가 "주인에게서 도망쳐서, 로마 감옥에 있던 바울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도망친 "노예여서, 붙잡히면 죽을 수 있었기에, 누가 쳐다보고 수군거리기만 해도 얼마나" 긴장했을까요?

 

다행히 "바울을 만났지만, 노예가 사역자가 되기까지, 자신을 바꾸어가는 노력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당시 "오네시모는 철저하게 과거의 죄와 허물을 회개했을 것이고, 더는 죄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고, 어쩌면 목숨을 걸고 간절히 자신을 바꾸어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장 든든한 주님을 붙들고 자신을 바꾸어갔을 때, 오네시모는 노예가 아닌 사역자로서, 주인 빌레몬을 다시 만났고, 많은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시이 "마레히사는 저서 '오늘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에서, 우리가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 도전합니다. 그러므로 "후회하지 않으려면,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며, 하루하루 내 삶을 신실하게 바꾸어가야!" 합니다. 힘들어도 "지금부터라도 나를 바꾸어가면, 나는 더 나은 내일을 살 수" 있습니다. 사순절 "셋째 주일, 한주도 가장 든든한 주님 붙들고 나를 바꾸어가며, 내 삶과 신앙이 더 든든해지기" 원합니다.

 

2. 든든한 주님이 계시기에, 언제나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주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두 가지 일을 강조"합니다. 먼저 "본문 25절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주의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신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본문 27절은, 당신 전부를 온전한 제물로 드린 예배로 우리의 죄를 다 사하셨다." 말씀합니다. 주님은 "성자 하나님이셨지만, 우리에게 이처럼 기도와 예배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주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기에, 나도 주님의 뒤를 따라 기도가 끊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께서 "많은 생명을 살리려고 당신을 단번에 드리셨기에, 우리도 주님을 닮아, 나를 제물로 삼는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기도와 예배로 주님을 뒤따라간다면, 우리 삶이 더 든든해지지!" 않겠어요? 현대인은 "이 땅을 살아갈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불안하고 막막함으로 방황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실제로 "오늘 우리는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가 선한지, 무엇이 옳은지 제대로 모르고" 살아갑니다.

 

마침내 "세상의 유행과 자기 고집대로, 향방 없이 살아가고, 게다가 시간마저 빨리 가기에, 시간이 갈수록 후회와 한탄, 절망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뒤따라갈 분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이유는 "쉽지 않지만, 주님을 뒤따라가면, 적어도 우리가 곁길로 빠지지 않고, 실족해도 다시 일어나 돌아올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 사역을 감당하는데, 한 청년이 크게 다쳐서" 찾아왔습니다.

 

청년의 "상태를 보니, 일하다가 발등을 다쳤고, 피가 멈추지 않아서, 나뭇잎으로 피가 흥건한 발을 싸맨 채, 가까스로 병원까지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선교사가 청년의 발등을 치료하는데, 얼마 후, 청년의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서 병원에" 왔습니다. 깜짝 놀란 "선교사가 '어둡고 먼 길인데, 어떻게 아들이 있는 곳을 알고 찾아왔는지' 묻자, 그 어머니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들이 다친 곳에서부터 아들의 핏자국을 뒤따라서 여기까지 왔어요."

 

악한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영적으로 든든하려면, 세상 그 무엇보다 예수의 핏자국을 뒤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많은 핏자국을 남기며 행한 일들을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성령도 "한결같이 나에게 주님의 핏자국을 따라가라고, 말씀을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도우십니다. 지금도 "우리 삶의 현장마다, 주께서 나를 살리고 일으켜 세운 핏자국, 용서와 위로의 핏자국, 치유와 회복의 핏자국이 너무도" 많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많고 선명한 주님의 핏자국을 제대로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절제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나를 구원하신 예수의 핏자국을 따라가고, 그 주님을 든든히 붙잡아야 할 절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핏자국보다, 내 이익과 자존심, 고집과 아집을 더 굳게 붙들고"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항상 마음 깊은 곳에,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생각하고, 매번 죄를 회개하지만, 여전히 주님의 핏자국보다 세상의 발자취를 따를 때가 더" 많습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이 참으로 유사했다고 곳곳에서 증언"합니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쳤고,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많은 "사람이 둘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원했고, 둘의 옷자락이라도 닿기 원하는 간절함이" 깊었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죽은 도르가를 살려냈고, 바울은 드로아에서 죽은 유두고를 살려"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바울이 행한 사역은 모두, 우리 주님께서 사 복음서에서 행하신 일을 그대로 뒤따라서 행하였음을" 아세요? 복음서는 "주님께서 앉은뱅이는 물론 수많은 병자를 치유하셨고, 나사로와 나인 성 과부의 아들,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리셨고, 수많은 사람이 주님의 그림자라도 덮이기 원하고, 그 옷자락이라도 만지려 했다고" 증거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무엇을, 누구를 뒤따르며 살아왔고, 그 결과가" 어땠나요? 만일 "사람과 세상의 유행을 뒤따라서 행복했다면, 내 삶을 바꿀 이유가 없지만, 만일 세상과 사람을 뒤따른 삶이 틀렸다면, 이제부터라도 든든한 주님을 뒤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내가 주님을 뒤따라 살아가면, 주께서 불안한 내 삶을 든든함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셋째 주일, 한주도 주님을 뒤따르며, 우리 삶이 날마다 더 든든해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