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히브리서

히브리서 묵상(22) - 하나님께서 도우시기에.

다솔다윤아빠 2024. 8. 15. 04:26

@ 히브리서 묵상(22-220717) 하나님께서 도우시기에(히브리서 13:1~6).

 

어떤 "소년이 집 앞의 큰 돌을 옮기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년이 "집에서 지렛대는 물론 여러 도구까지 동원했지만, 여전히 큰 돌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의기소침한 "소년이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돌을 옮길 수가 없어요!' 말하자, 아버지가" 말합니다. "너는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소년이 "이유를 묻자, 아버지는 '너는 혼자만 힘썼지, 아버지인 나에게 전혀 도움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소년처럼 내 삶을 짓누르는 다양한 돌을 치우지 못한 채, 여전히 삶의 무게에 눌려서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기에, 54: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다." 핵심은 "내 삶을 힘들게 하는 수많은 문제, 죄와 죽음까지도 도울 수 있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만, 힘들고 죽겠다고 하소연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도와도 이를 도움인 줄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너무 쉽게 실족"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만 나를 도우실 유일한 분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삶에서 나를 짓누르는 다양한 돌들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본문 6절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말씀합니다. 여기서 "담대히 말함은 자신 있고 분명하게, 용기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돕는다. "원어는 '여호와께서 내 안에 계신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영혼이 투옥되어 학대받고, 성적인 타락이 심각해지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이에 "본문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장 크기에, 절대로 사람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강조했습니다. 인간은 "어렵고 힘들수록 하나님께 도우심을 더 구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죠지 뮬러는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시험과 고난이 클수록 하나님의 도움이 더욱 크고 분명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요즘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은 가장 큰 힘과 위안이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도 "힘들고 아파하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여전히 돕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기에, 어려워도 베풀고 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3절은 "당시 복음을 영접한 기독교인 중에 투옥되어 박해와 학대받는 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당시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본문 1~2절은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말씀합니다. 어려울수록 "형제 사랑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했고, 심지어 힘들수록 더욱 손님을 잘 대접해서, 아브라함처럼 복 받으며 살아가야 함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형제 사랑을 계속하고 손님을 접대하려면, 내 시간과 노력, 물질적인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에 "본문은 어렵고 힘들수록, 오히려 사랑으로 섬기고, 주고 베풀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더 크고 분명히 나타난다." 말씀합니다. 많은 "교회와 가정마다 상황이 어려우면, 하던 일을 줄이고, 마음의 문마저" 닫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낀다고 삶이 더 나아지지 않고, 역설적으로 쓸 때 쓰고, 주고 베풀면, 오히려 그 삶이 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영혼은 어렵고 힘들 때, 인간적인 생각으로 아끼려고만 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에 순종하여 베풀고 주면서, 더 큰 하나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갑니다. 여기서 "주고 베푸는 삶은 내 능력 이상으로, 내게 있는 것을 다 주고 손가락 빠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서 "체면과 위신 때문에 베풀고 준 후에 후회하는 영적인 만용과 교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 삶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할 만큼 주고 베풀라!" 말씀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주고 베풀 수 있지만, 주고 베풀어야 함을 알지만, 주고 베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주고 베푸는 마음의 중심과 믿음을 아시고, 더 큰 것을 상급으로 채워"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고 베푼 곳마다 하나님의 더 큰 채우심이 있음을 잘 알지만, 현실은 베풀고 주기보다 더 가지려는 욕심에 빠져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랄에서 "이삭이 우물을 파면, 아비멜렉이 파서 얻은 우물마다 흙으로" 덮었습니다.

 

당시 "근동에서 우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젖줄"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삭이 우물을 얻을 때마다, 아비멜렉은 계속 그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점점 가난해지고, 아비멜렉은 점점 부유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26:28절은, 계속 주고 베풀었던 이삭과 계속 빼앗았던 아비멜렉의 삶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삭은 주고 베풀수록 더 번성해졌고, 마침내 아비멜렉이 먼저 찾아와서 고개를 숙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달란트로 무슨 일에 어떻게 돕고 베풀어야!" 할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최근 어떤 일을 내게 보이시고, 들려주시고, 마음에 감동하시며 행하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까? 보고 "들으면, 자꾸 마음이 쓰이고, 관심이 간다면, 그것은 내가 꼭 주고 베풀 일, 헌신해야 할 일"입니다.

 

물론 "바쁜 이민자의 삶에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돕고 베푸는 것이 부담되고 어렵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바쁜 중에도, 돕고 베푸는 삶에 하늘의 풍성한 복을 채워" 주십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통해 베풀고 주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청년이 길에서 아이를 업은 여인이 먹을 것과 돈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불편한 마음으로 귀가한 후, 하나님께 따지듯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아이까지 업은 그 불쌍하고 힘든 여인을 왜 도와주지 않나요?" 이에 "하나님께서 청년에게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나는 불쌍한 아기 엄마를 돕기 위해 너를 그곳에 지나가게 하였다!" 반복하지만, "살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보이고 들려주고, 마음에 실천하라고 도전하는 일은, 지금 내가 손을 펴서 주고 돕고 베풀어야 할 일"입니다. 만일 "주변에서 누군가 힘들고 아파하는 영혼이 생각나면, 바로 그 영혼이 내가 돕고 섬겨야 할 분"입니다.

 

만일 "교회에서 해야 할 어떤 일이 보여서 마음에 부담이 되면, 바로 그 일이 내가 직접 돕고 헌신해야 할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이용하려고, 마음에 감동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내게 복 주시고 도우려고, 성장과 발전을 누리게 하려고 거룩한 부담을 주시는 분"입니다. 한주도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는 일과 사람에게 주고 베풀어서, 더 큰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기에, 세상과 역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3~4절은 "당시 사회적으로 비일비재했던 악행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결혼은 "모든 사람이 귀하게 여겨야 했지만, 당시 참소를 더럽히는 간음과 음행이 많았는데, 심지어 이처럼 타락된 삶을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또한 "당시 히브리서 수신자 중에도 돈을 매우 사랑해서, 하나님보다 세상과 물질을 더욱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불행히도 "많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입히고 먹이심을 알면서도,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실족하여" 넘어졌습니다.

 

이에 "본문은 성도의 삶은 거룩해야 하고, 물질에 사로잡혀 살아가지 말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요약하면 "세상은 음행과 돈을 사랑함이 당연해도, 기독교인은 이와 다른 삶, 역행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도전"합니다. 문제는 "오늘도 성적 타락과 황금만능주의는 이미 도를 넘어섰지만, 11:45절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말씀합니다. 거룩함은 "세상과 구별된 삶, 가나안과 다른 삶,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기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세상과 다르게 거룩해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분별하여 깨달을 수 있고, 그 도우심 안에서 영적인 정도를 가며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진돗개와 셰퍼드가 달리기 시합을 했는데, 진돗개가 이기다가 갑자기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주인이 "의아해서 진돗개에게 이유를 묻자, 진돗개가 눈앞에 있던 '개발제한구역' 표지를" 가리켰습니다. 진돗개는 "너무 똑똑해서 가야 할 길과 가야 하지 말아야 할 길을 잘 구분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거룩함으로 지켜야 할 제한 구역을 너무 쉽게 넘어가기에, 세상이 기독교인의 탈선과 세속적 삶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거룩해야 할 교회와 기독교인이 세상과 역행하기보다, 세상과 같고, 심지어 세상보다 더 악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과 역행하는 거룩한 삶을 더 힘있게" 도우십니다. 400년간 "노예로 살았던 선민이 출애굽 때, 당시 선민의 정체성은 애굽인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애굽화 되었기에, 선민은 10가지 재앙과 홍해 사건을 체험했지만, 달라지지 않았고, 심지어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소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광야에서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지만, 선민은 여전히 거룩함과" 멀었습니다. 반면에 "출애굽 2세대는 세상과 역행하는 삶을 선택하여, 하나님 도움으로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세상을 좇아서 실패한 삶과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성공한 삶을 너무 많이 보고 들어서 잘" 압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이 성공을 원하면서, 어리석게도 여전히 세속적 방식을 고집"합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도움은 오늘도 여전하지만, 우리가 거룩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아지고 성공하기 원한다면, 세상과 역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014"기자 출신의 이신영 씨의 책, 콘트래리언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경영인 석학과 예술인을 인터뷰하여서, 이들의 성공 비결, 세상과 다른 생각과 행동 양식에 관해" 보고합니다. 콘트래리언은 "기존의 상식과 전통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세상과 다르고 역행하는 자신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삶의 방법으로 살아서 성공한 사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까지 하나님 은혜로 살아온 나부터 영적 콘트래리언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영적 "콘트래리언이 되어,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 하시면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시면 멈추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부터 "영적 콘트래리언이 되어 세상에서 성적 타락과 황금만능주의가 극심해질수록,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세상과 역행하며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지" 않겠어요?

 

하나님은 "지금도 영적 콘트래리언을 구별하여 도우시며 세상과 역행하도록 하늘의 능력과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콘트래리언으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멀어진 삶을 살았던 적이 심히" 많았습니다. 다행히 "아직 안 늦었기에, 지금부터라도 내 삶의 방향이 세속적 삶보다 거룩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삶이 세상과 역행하는 영적 콘트래리언이 되어, 하나님의 도움으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