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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묵상(06) - 니느웨도 바뀔 수 있기에.

다솔다윤아빠 2024. 8. 15. 04:33

@ 요나서 묵상(06-220918) 니느웨도 바뀔 수 있기에(요나서 3:1~6).

 

히틀러의 "경호원이었던 쿠르트 바그너는 히틀러를 신처럼 숭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히틀러가 베를린 한 벙커에서 자살하자, 바그너는 크게 낙망해서, 자신도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바그너는 죽기 전, 거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전도용 소책자를 깊이 읽고 큰 도전을 받아서, 자기 미래를 새롭게 계획"합니다. 즉시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서 목사에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예수는 구세주이시며 평화의 주인입니다."

 

세상에는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철학과 사상, 정치 체계와 완악한 죄, 고집과 자존심이"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은 안 바뀐다고 단정하지만, 하나님께서 못 바꾸실 것은"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세상에서 가장 크고 어려운 이적이 있다면, 죄인인 내가 예수를 믿고, 이전과 달라져서 기독교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팬더믹은 "많은 것을 바꾸었지만, 그 변화가 완전하지 않기에, 계속 새롭게 바꾸어가야 할 숙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이 급변한다고 내가 이를 따라가는 수동적 변화보다, 오히려 믿음으로 내가 먼저 능동적으로 변화되어야, 우리 가정과 교회가 바뀔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니느웨는 불신 지역이었지만, 대제국 앗수르의 수도로, 그 자긍심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서쪽 소국인 이스라엘에서 온 무명의 선지자, 요나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5절은,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를 입었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믿었다. 와이야아미누는 의심 없는 확신을" 뜻합니다. 특히 "금식은 음식을 포기하면서까지 자기 죄를 내려놓는 결단"입니다. 또한, "높고 낮은 자 모두가 굵은 베를 입음은 기존의 안락함을 뒤로하고, 새롭게 되겠다는 결단"입니다. 놀랍게도 "요나가 하루 동안 전했던 복음으로 완악한 성읍 니느웨가 완전히 바뀌었던 것"입니다. 나아가서 "본문은 완고한 니느웨도 변했는데, 선지자 요나와 선민 이스라엘은 바뀌지 않았음을 크게" 책망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메시지는 니느웨도 바뀌었기에, 선민 이스라엘과 오늘 우리도 새롭게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함을" 도전합니다. 실제로 "내가 나를 먼저 바꾸려는 능동적 믿음의 태도에 따라서 현재와 미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니느웨도 바뀌었기에, 나부터 나를 신실하게 바꾸어가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니느웨도 바뀔 수 있기에, 내 삶을 바꾸려면 시간 낭비하며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요나가 "불순종하여 다시스 행 배를 탄 결과, 큰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렇게 "물고기 뱃속까지 왔지만, 생과 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을 겪은 후, 마침내 니느웨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요나를 포기하지 않았고, 어렵게 니느웨에 도착한 요나에게" 말씀합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에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그리고 "본문 3절은, 요나가 여호와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말씀합니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시간 낭비, 너무 멀리 돌아서 왔지만, 하나님은 당신 뜻대로 니느웨를" 바꾸셨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죽을 위기를 겪었던 요나가 니느웨에 도착하여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 마음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니느웨로 올걸! 왜 그 고생을 했을까? 왜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을까?' 후회하지!" 않았겠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루 24시간을 공평하게 주셨지만, 같은 시간을 보낸 삶의 결과는 천차만별"입니다. 혹자는 "하루 24시간을 잘 활용해서 많은 것을 남기지만, 혹자는 24시간을 10분처럼 낭비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주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바르게 사용하며" 살아가세요? 5:16절은 "세월을 아끼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세월을 아낌은 주어진 시간에서, 선하고 복된 열매를 많이 건져 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나처럼, 세월을 아끼기보다 오히려 허송세월할 때가 더" 많습니다. 실제로 "새롭게 바꾸어서 더 많은 것을 실천할 수 있었지만, 더 성장할 수 있었지만, 삶에서 건져 올리는 것이 너무도" 적었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기도보다 불평으로, 나보다 남이 해야 한다는 회피로, 도전을 잃은 자포자기로 시간 낭비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팬더믹을 "지나며, 많은 교회가 출석률 저하, 헌금 감소, 역동성 상실로 인해 힘들어" 합니다. 실례로 "팬더믹 중, 716개 이민 교회가 문을 닫았고, 지금도 교회마다 차이가 있지만, 평균 35%가 대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온라인 예배와 대면 예배의 집중력 차이가 너무도 크다는 것"입니다.

 

만일 "집중력을 잃은 온라인 예배로 내 영적인 자세가 굳어져서 바뀌지 않으면, 훗날 내 미래가 어떻게" 될까요? 물론 "불가피하게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도 있지만, 만일 게으르고 귀찮아서 현장 예배를 외면한다면, 그 신앙이 어떻게" 되겠어요? 최근 "식당과 마켓, 운동 시설과 관공서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곳에서 정상화 된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유독 교회만 정상화 되지 않았고, 우리 교회도 80~85%가량만 현장 예배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다시 예배와 믿음의 자리를 회복해야,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시간 낭비하지 않고, 신실하게 채워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내 믿음과 예배 자리를 잃으면, 마침내 이 땅과 내세의 복을 다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시간 낭비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부터 바꾸어가야!" 합니다. 요나는 "어렵게 니느웨에 도착하고, 더는 미루지 않았고, 즉시 회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중으로 "미룰 수 없었고, 그렇게 즉시 시작하여, 니느웨가 바뀌었던 것"입니다. 마귀가 "가장 많이 쓰는 무기는 '말씀대로 살아, 봉사하고 기도해, 예배드리고 찬양해. , 내일부터 해!'" 말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지혜로운 영혼은, 시간 낭비하지 않고, 지금 즉시 결단하여, 나를 바꾸며,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갑니다. 2:21절은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말씀합니다.

 

라합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서, 더는 세상에 빠져 살지 않겠다고 작정하며, 여리고 정탐꾼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훗날 여리고 전쟁 때, '붉은 줄을 매면 살려주겠다!' 정탐꾼 말대로, 즉시 창에 붉은 줄을" 매달았습니다. 그렇게 "더는 시간 낭비하지 않고, 즉시 바꾸었기에, 마침내 라합은 다윗과 메시아의 조상" 되었습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기에, 지금부터 내 영적 자세를 바르게 해야, 남은 삶을 시간 낭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여전히 '나중에, 조금 더 있다가' 외치면, 이는 시간 낭비이기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내 예배와 기도 자세, 말씀을 대하는 영적 자세를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한주도 "하나님과 바르고 신실한 관계를 위해서, 매일 말씀에 맞게 나를 즉시 바꾸어가며, 시간을 건져 올리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2. 니느웨도 바뀌었기에, 내 삶을 바꾸려면, 하면 되는데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이겨야 합니다.

 

본문 5절은 "요나가 니느웨에 도착 후, 복음을 전한 결과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성경은 "니느웨의 변화를 '믿고, 금식하고, 베 옷을 입고' 세 단어로 설명"합니다. 사흘 "길의 거대한 성읍, 니느웨가 요나가 하루 동안 전한 말씀으로" 바뀌었습니다. 문제는 "요나가 이렇게 말씀을 전하면 되는데, 자기 생각과 감정에 빠져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나는 "그저 선민을 괴롭혔던 니느웨가 싫었고, 망했으면 하는 자기 편견이 너무도" 강했습니다. 문제는 "만일 요나가 말씀을 전해서 니느웨가 바뀔 수 있음을 알았다면, 그렇게 죽을 위기로 자신을" 몰아갔겠어요? 오늘 "우리는, 분명히 할 수 있지만, 편함과 익숙함에 빠져서 변화를 두려워하고, 새로게 시도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현실과 세상에 대한 불평과 원망까지 더해지면서, 할 수 있는 일을 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실례로 "많은 분이 영상 모임이 어렵다고 단정해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시도해 보면 "충분히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기에 성장과 발전이 더뎌지고, 새로운 은혜로부터도" 멀어집니다. 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어떤 선교사가 예배당에 있는데, 갑자기 한국인들이 몰려오자, 당황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자 시끼들은 이쪽으로, 여자 시끼들은 이쪽으로, 아이 시끼들은 앞으로!"

 

오늘 "우리는 기도가 능력 있고, 말씀과 예배가 소중하고, 봉사와 헌신이 값지다는 것을 잘 알지만, 현실은 그 능력과 소중함, 값짐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영혼은 많지!" 않습니다. 이유는 "충분히 할 수 있고, 해야 함을 알면서도, 여러 이유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해 보지도 않고 못 한다고 포기하는데, 무슨 발전과 변화가" 있겠어요? 물론 "새롭게 시도하여 바꾸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도전하고 시도해야 더욱 나아지지!" 않겠어요?

 

어떤 "엄마가 사탕을 좋아해서 이빨이 썩은 아이를 간디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엄마는 "간디가 아이를 타이르면, 말을 듣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간디는 엄마에게 '한 달 후 오라!' 말하고, 다시 또 '한 달 후 오라!'" 말했습니다. 그렇게 "엄마가 세 번째 방문했을 때, 비로소 간디가 '! 사탕을 줄여야 해!'" 타일렀습니다.

 

놀랍게도 "아이가 간디의 말에 사탕을 안 먹겠다고 하자, 엄마가 '왜 두 달을 기다리게 했는지!' 이유를 묻자, 간디가" 답했습니다. "나도 사탕을 좋아해서 못 끊었는데, 어떻게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하겠어요!" 당시 "간디는 형식적으로 조언하지 않았고, 힘들었지만, 자기도 노력해서 사탕을 끊었기에, 아이에게 준 도전이 더 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롭게 바뀌고 더 나아지기 원하면서, 새롭게 도전하거나 시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나처럼 "하면 되는데, 해 보지 않고, 두려워서 이 핑계 저 핑계로 불 신앙에 빠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우리 삶에서, 굳어져서 바꾸기 힘든 것들도 있지만, 말씀에 맞게 바꾸려는 노력과 시도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충분히 신실하고 선하게 바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임마누엘의 은혜를 알면, 새로운 일을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만난 앉은뱅이에게 행전 3:6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당시 "베드로는 자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없었지만, 함께하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힘입고 이렇게 담대히 선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역사하심을 확신했기에 담대할 수 있었고, 자신과 앉은뱅이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을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나 혼자는 못해도, 임마누엘의 은혜가 있으면,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새롭게 도전할 때, 하나님께서 앞서가서 길을 열어주시고, 나를 바꾸어주심을" 기억합시다. 마귀는 "'못해, 하지 마, 그 나이에 무슨, 복잡한데 왜 그 고생을 해!'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어, 내가 도울 거야, 함께하자.'" 말씀합니다. 한주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새롭게 시도하고 노력하여 나를 바꾸어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