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묵상(08) - 갇힘이 열림이 되려면.

다솔다윤아빠 2024. 8. 16. 04:38

@ 출애굽기 묵상(08-230423) 갇힘이 열림이 되려면(3:16~20).

 

오늘날 "학교는 학생을 모범생과 문제아로 구분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모범생이 지각하면 '밤새워 공부했구나!' 말하고, 문제아에겐 '뭐 하다 매일 늦니?' 책망"합니다. 모범생이 "코피가 나면 '쉬면서 공부해라!' 말하고, 문제아에겐 '수업 시간에 누가 콧구멍 후벼!' 질책"합니다. 모범생이 "성적이 오르면 '수고 많았다.' 말해도, 문제아는 '너 누구 답을 커닝했니?' 의심"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쉽게 빠지는 편견과 갇힌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사람은 이처럼 다양한 편견과 선입견, 자기 고집과 생각, 심지어 이단과 사이비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인간이 영적인 편견에 깊이 갇히면,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맹목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실제로 "우리는 모두 갇힘보다 열린 환경, 열린 사회, 열린 교회, 더 나은 삶을" 원합니다. 문제는 "영적 갇힘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열림의 비결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만난 모세에게, 선민의 상황을 애굽의 고난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여기서 "고난, 메오니는 단순한 고생이 아니라,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사람이 당하는 학대와 괴롭힘, 굴욕적 고통'"을 뜻합니다. 당시 "선민에서 애굽에서 당한 400년의 고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메오니! 한 단어가 잘 설명해" 줍니다. 이처럼 "유대인의 고생이 극심했기에, 하나님은 본문 19절에서, '애굽을 강한 손으로 치신다!'" 말씀합니다.

 

여기서 "강한 손, 야드 하자카는 원수에게서 선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본문 20절에서, 선민을 극심한 고난에서 구원하시려고 여러 가지 이적까지" 행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은 강한 손으로 많은 이적을 베풀어서, 큰 고난에 갇힌 선민에게 길을 열어주셨고, 가나안까지" 이끄셨습니다. 기독교인은 "죄와 죽음에 갇혀서 살아가다가, 예수의 십자가 은혜로 열린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기독교인과 불신자 모두, 자기도 모르게 죄와 허세, 낙담과 좌절, 미움과 싫증에 갇혀" 살아갑니다. 문제는 "죄인인 인간이 예수 안에 갇혀 살면 행복할 수 있지만, 세속에 갇혀 살면, 행복보다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사에 갇힘이 아닌 열린 삶을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살펴봅시다.

 

갇힘이 열림이 되려면, 매사에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역자와 합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큰 학대와 고난에 허덕이는 선민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기 위해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문제는 "당시 모세가 절대로 혼자 힘으로, 출애굽을 통해 가나안까지 선민을 이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본문 16절에서, '이스라엘 장로를 모아서 함께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세와 장로, 선민의 합력이 필요했고, 또한 하나님의 강한 손이 함께하셔야, 출애굽 후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요약하면 "갇힘이 열려서 가나안까지 가려면, 모세, 장로와 선민, 하나님, 모두의 합력이 필요"했습니다. 만일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출애굽과 가나안 입성은 불가능"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엇인가 제한받고 갇히면, 인력으로 이를 열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문제는 "갇힘을 열려는 본능이 세속적인 이기심과 자기 의로움과 합쳐지면, 더 큰 닫힘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갇힌 현실에서 수직적 수평적 합력을 찾아야!" 합니다.

 

마치 "삼 겹줄이 잘 안 끊어지듯, 나부터 하나님과 주변 동역자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합력보다, 자기 자신을 그릇된 곳에 가두고" 맙니다. 여전히 "내 욕심과 생각, 고집과 자기주장에 갇혀서, 더 나은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갇힘이 열림이 되려면, 알파벳 X를 직접 삶과 신앙에서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X"윗선과 아랫선이 서로 정확하게 사 방향으로 그 길이가 같아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X는 내가 중심에 있고, 한 선은 주변 동역자와 합력, 다른 한 선은 하나님과 합력을" 뜻합니다. 성숙한 "기독교인은 이처럼 X자형 삶을 살아가고, 수직적 수평적 합력,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의 갇힘을 열어"갑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는 원만하지만, 이웃과 관계가 짧고, 심지어 연결이 끊어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연결된 줄이 굳건한데, 어떻게 이웃과 연결된 선이 짧아지고 끊어질 수" 있을까요?

 

만일 "내 삶에서 이웃 사랑이 짧아지고 끊어져 있다면, 하나님과 관계, 지금 내 믿음부터 의심해 봐야!" 합니다. 14:20절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X의 삶을 살며 갇힘이 열리려면, 내 신앙생활이 하나님과 주변 동역자와 함께 한 방향을 바라보고 올라가야!" 합니다.

 

본문 17절은 "내가 너희를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당시 "모세와 선민이 하나님과 하나 되어 올라가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X의 삶을 추구하려면, 이처럼 하나님 주시는 궁극적 목적지를 향해, 한 방향을 바라보고 함께 올라가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가정과 교회가 그 추구하는 방향성이 하나 됨보다 제각각이어서, 합력이 깨지고" 있습니다.

 

가족이 "향하는 방향과 즐거움이 제각각 달라서, 가정이 닫혀가고" 있습니다. 교회도 "하나님 주시는 한 방향이 아니라, 제각각 원하는 방향이 옳다고 서로 주장"합니다. 그렇게 "교회와 가정에서, 사공이 너무 많은데, 그 배가 어떻게 바로" 가겠어요? 이에 "우리의 갇힘이 열리려면, 하나님 주시는 가나안만 집중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제각각 "보는 것을 멈추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에만 집중하기" 원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한 목적을 가졌을 때, 그들은 합력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항상 갇힘이 열렸지만, 훗날 두 사도는 마가 요한의 동행 문제로 크게" 다투었습니다. 불행히도 "위대한 두 사도가 더는 한 목적이 아니라, 서로 반목하며 X의 삶에서 실패했고, 고집과 아집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연약한 인간은 누구라도 하나님 주시는 한 방향을 바라보지 못하면,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죽어가는 영혼 구원과 주의 나라 확장이란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할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 확장과 영혼 구원에 더욱 집중한다면, 다른 부수적인 것들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비록 "내 뜻과 달라도, 하나님 주신 더 큰 비전에 집중하며 동역한다면, 교회가 받을 복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많을까요? 한주도 "우리가 하나님과 주변 동역자와 함께하며 X의 삶을 이루어, 갇힘이 열리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2. 갇힘이 열림이 되려면 예배드리는 삶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본문 18절에서, 모세가 바로에게 출애굽을 요청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당시 "선민의 출애굽 목적은 학대와 부르짖음에서 벗어나는 것도 급선무였지만, 가장 핵심적인 목적은, 택함을 받은 선민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 공동체가 되어야 함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바른 예배가 없는 선민의 삶은, 계속 애굽의 학대에 갇혀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배 없이 가나안에 들어간 선민의 삶은 여전히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선민이 선민 되고, 참으로 출애굽 하려면, 더는 애굽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기는 바른 예배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예배는 "죄에 갇혀 있는 사람이 하나님 은혜로 들어가는 영적 관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예배를 통해서 갇힘이 열리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삶이 바뀔 수 있지만, 이처럼 소중한 예배가 점점 허울뿐인 형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정기 예배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거룩한 예배가 상품을 사듯 선택의 대상, 평가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에 담임 목사가 주일학교에서 짧게 설교를 했지만, 목사와 아이들, 교사 모두가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마침내 "축도로 예배를 마치는데, 축도를 처음 본 아이가, '왜 목사님이 손을 들어?' 묻자, 친구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설교를 잘 못 했으니까, 저렇게 벌서는 것이야!"

 

오늘 "우리가 교회 안의 정기 예배에도 간절함이 없는데, 어떻게 세상에서 예배자로" 살아가겠어요? 모세는 "얼마후 바로에게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말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목적이 바른 예배 때문임을 말씀했지만, 이는 정해진 예배, 성전 예배만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공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이 삶의 예배자로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죄인이 "삶의 예배자로 살아갈 때, 편견과 악함에 갇힌 내 삶에 은혜의 통로가" 열립니다. 대하 17:9절은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 말씀합니다. 여호사밧은 "선민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도록" 도왔습니다. 이로 인해 "다양한 우상 숭배에 갇혀 있던 선민이 영적으로 눈을 떴고, 하나님께만 엎드리는 참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삶으로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고, 예배자로 살아가도록 도와서, 여호사밧 시대는 큰 번영을" 누렸습니다. 누구보다 "내 삶과 언행이 예배자로 바뀌어야, 갇힌 삶이 열리고, 갇힌 생각이 하나님 뜻을 바르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말씀을 잘 알고, 많이 암송한다고, 항상 삶의 예배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능력 있는 예배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고, 간증이 날마다 더 깊어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라는 단어에 익숙하지만, 말씀대로 살아서, 깊은 간증을 체험한 예배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삶으로 드린 예배, '주일을 평일처럼, 평일을 주일처럼 지키는 삶의 예배'가 없기에, 우리는 주일 예배조차 영과 진리로 집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부모가 삶으로 예배드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 자녀가 바른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겠어요? 토레이 "목사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성경 번역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경의 가장 뛰어난 번역은 삶으로 번역한 성경입니다. 우리가 삶으로 성경을 번역한다면 세상 불신자들이 가장 뛰어난 성경 번역본을 볼 것입니다." 이처럼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가장 뛰어나고, 가장 살아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이 봐도 은혜롭고, 내게도 부끄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내 언행과 선택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삶의 예배자답게 은혜로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삶으로 예배드리고, 내 언행으로 이웃을 살리고 세우는 예배를 통해, 갇힌 삶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내 삶이 예배와 멀어져 있다면, 내 신앙은 물론 내 예배조차 죽어 있는 것"입니다. 한주도 "정해진 예배는 물론 삶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갇힌 내 삶이 더욱 넓게 열리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