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묵상(09) - 소극적인 모세를 향한 하나님 사랑.

다솔다윤아빠 2024. 8. 16. 04:39

@ 출애굽기 묵상(09-230430) 소극적인 모세를 향한 하나님 사랑(4:1~9).

 

어떤 "병원에 병약한 아이를 잘 치료하기로 유명한 소아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의사는 "병약한 아이를 위한 처방전에, 약과 함께 꼭 이런 글을" 첨가했습니다. "이 아이는 세 시간마다 사랑을 받아야 함!" 생각해보면 "병약한 아이만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사랑과 보살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현대인 "대다수가 불안과 고독, 주변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해서 상처받고, 신체적 질병에 빠져 고생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 "불신자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알고 살아감에" 있습니다. 물론 "악한 세상에서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하나님 사랑을 잊고 살 때도 있지만, 넘어지고 고독한 인생, 아픈 인생을 세우는 가장 큰 약은 사랑"입니다. 문제는 "나부터 타인을 사랑하며 살려면, 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내게 생명을 주신 십자가 사랑, 전부를 주신 예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살아가세요?

 

모세는 "출애굽을 명하신 하나님께, 본문 1절에서, 세 가지 이유로 순종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않고, 내 말을 듣지 않고, 여호와께서 제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문제는 "모세가 이렇게 답변한 시점이, 하나님께서 '함께하며 도울 거야!' 약속하신 직후"였습니다. 당시 "모세는 40년 전, 나름대로 도왔던 동족이 '누가 너를 재판관으로 세웠어!' 배척한 말이 생각나서, 소극적이고 깊은 불 신앙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이적, 나병이 손에 났다가 치유되는 이적까지" 보였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훗날, 나일강이 피로 변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출 4:10 절에서, 하나님 명령을 이렇게 거부"했습니다.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예요!" 놀랍게도 "이랬던 모세가 출애굽 리더가 된 이유는, 소극적인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깊고 넓고 온전한 사랑 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이 무기력한 이유는 하나님 사랑을 깨닫지 못해서,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음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 사랑을 체험한 영혼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소극적인 모세를 사랑하신 것처럼, 오늘도 연약하고 소극적인 내게 주시는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소극적인 모세에게, 항상 보여주시고 앞서가시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표현이 6번 나오는데, 하나님은 말씀만이 아니라, 모세의 평범한 지팡이를 선민을 이끄는 지도력의 상징으로" 바꾸셨습니다. 당시 "지팡이가 뱀이 되자, 하나님은 본문 4절에서 '뱀의 꼬리를 잡아라!'" 명했습니다. 보통 "뱀은 머리를 잡아야 하는데, 모세가 순종해서 뱀 꼬리를 잡자,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됩니다. 이는 "모세가 순종하기만 하면, 상식을 뛰어넘는 은혜와 이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나병이 손에 발했다가 깨끗하게 되는 이적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치병을 치유해서,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모세와 선민을 온전히 치유할 것도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훗날, 나일강이 피로 변할 것을 말씀하며, 하나님께서 애굽이 신성하게 여기는 나일강, 애굽의 신까지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소극적인 모세와 과거 현재 미래에도 항상 함께할 것이며, 끝까지 선민을 책임지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입술만의 사랑이고, 제한적이고 상황에 따라서 자주" 변합니다. 최근 "아들 방에 들어갔는데, 아이가 바쁘다며 '안 나가!' 말하고, 곧바로 '아빠 미안해!' 사랑해!' 금방 사과했지만, 마음이" 아팠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한결같고, 내가 체험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사랑으로 살아가면서, 이를 모르고, 마치 내가 다 한 것처럼, 못 받고 안 받은 것처럼" 살아갑니다.

 

탕자가 "아버지 재산을 모두 탕진한 후, 부끄럽게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잘 왔다!' 말만 하지 않고, 탕자의 옷을 갈아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여기서 "옷과 신발은 탕자가 더는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 되었음을 뜻하고, 가락지는 아들임을 인정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말과 혀보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탕자를 받아주셨듯, 또 다른 탕자인 우리가 지금 여기서 예배드림은 모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 어려울 때마다 살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나와 내 자녀를 지키셨지만, 우리는 이를 당연하게 여겨서, 그 가치를 몰랐던 적이 더" 많았습니다. 어떤 "아이가 태어나면서 가정이 깨져서, 가족이 길바닥으로" 내몰렸습니다. 아이는 "자라면서, 빚쟁이에게 쫓기며 수없이 이사했고, 굶지 않으려고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아이가 하나님을 만난 후, 목사가 되어서, 이런 찬양 가사를" 썼습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우리가 "손경민 목사의 찬양을 통해 은혜받는 이유는, 나도 이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 아닐까요? 생각할수록 "그 무엇도 당연하지 않았고, 너무도 소극적인 나를 향한 하나님 사랑이었고, 앞으로도 그 사랑이 나를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실례로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 사랑으로 살아가기에, 우리가 타인을 사랑해야 함도 귀하지만, 하나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나를 사랑함은 이기적이고 나 중심적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 사랑으로 나를 존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과일을 먹을 때, 일부러 좋은 것부터 먹는데, 이는 저를 향한 작은 배려"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나를 사랑하려면, 내게 부정적 소리보다 아름답고 선한 소리를 듣게 해야!" 합니다.

 

세상이 "악해서 실족도 많은데, 일부러 나를 패역한 세상에 노출할 이유가" 없잖아요! 좋은 "이야기를 들어도 부족한데, 일부러 좋지 않은 말, 상처받는 말에 귀 기울일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게 "내게 좋은 것을 먹이고, 듣게 하고, 내게 선물도 주고, 나를 칭찬하며 사랑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내게 말씀을 먹이고, 기도로 은혜를 채우고, 나부터 바로 세워가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나부터 나를 말씀에 맞게 사랑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웃과 자녀 사랑에 실패하고, 하나님 사랑에서도 점점" 멀어집니다. 지금도 "마귀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은혜를 방해하고 공격하기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나를 사랑함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선한 싸움을 싸우며,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타인과 나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한주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사랑으로 누군가와 나를 사랑하며 소극적인 나를 더욱 선하게 가꾸어가기" 원합니다.

 

2. 하나님은 소극적인 모세에게 하나님 사랑으로 물러서지 말고, 확신을 품고 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고도, 너무 소극적이어서, 헌신보다 회피를 먼저 생각"합니다. 비록 "말씀에 순종해서 뱀 꼬리를 잡았지만, 모세는 여전히 두려워서 뱀을" 피합니다. 또한 "나병이 생겼다가 치유되고도, 모세는 여전히 소극적이어서, 하나님은 다시 나일강이 피가 될 것을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소극적인 모세를 설득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소극적인 불 신앙을 이겨내고, 확신으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모세가 "두려움보다 당당함으로 출애굽을 이끌기" 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원하지만, 문제는 받은 사랑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할지 잘" 모릅니다. 그렇게 "사랑을 받고도 그 사랑을 활용하지 않기에, 이기적 신앙에 빠지고" 맙니다. 심지어 "하나님 사랑으로 살면서, 그 가치와 능력을 몰라서, 여전히 소극적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나름대로 사랑하며 산다고 하지만, 그 사랑이 살리고 세우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끼리, 자기들만의 사랑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가,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 사랑한다면, 이는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하나님 사랑으로 살았으면서, 그 사랑을 실천하고 표현하는 일에 자주 실패"합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나를 사랑으로 살리신 이유는, 나도 누군가를 살리고 세워가야 하기 때문" 아닐까요?

 

비록 "인간이 소극적이라도, 하나님 사랑을 확신하면, 받은 그 사랑으로 타인을 살리고 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 사랑을 받고도, 그 사랑을 선용하지 못한다면, 내가 사랑을 받았는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어제부터 "바자회가 진행되는데, 목적은 온두라스 선교와 구제 사역, 후세를 위한 장학기금 마련에" 있습니다. 정말 "많은 분이 수고하고 헌신하셨는데, 문제는 내가 받은 하나님 사랑으로 이 사역에 동참하셔야!" 합니다.

 

몇 달간 "반찬 재료를 준비하고, 새 물품을 기증받고, 시간과 열정을 드린 이유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해서, 받은 사랑을 서로 나누기 위함에" 있습니다. 작지만 "내가 사는 물품, 타인에게 줄 선물, 전도를 위해 사는 모든 것이, 온두라스의 생명을 살리고, 힘든 교우에게 큰 힘이 되고, 후세를 세워가는 장학금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받은 사랑을 바르게 활용한다면, 비록 삶이 힘들지만, 우리가 더 힘써서 참여하고 도와야 하지!" 않겠어요?

 

행전 24:10절은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말씀합니다. 이는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신의 회심을 간증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바울이 주의 사랑을 받고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할까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귀했기에, 바울은 그 사랑으로 어떻게 헌신할지 먼저" 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사랑을 체험한 영혼은 '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할까?' 물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은 받은 사랑을 선용하는 영혼을 통해서 힘있게" 일하십니다. 소극적인 "인간도 하나님 사랑을 받으면, 포기와 낙담보다 더욱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자꾸 사소한 일에 포기하고 낙담한다면, 내가 받은 하나님 사랑을 확인해야!" 합니다.

 

스코틀랜드 "한 교회에서 젊은 여성이 문제아가 모인 반을 섬기겠다 나섰는데, 그 교실에 바비란 아이가 가장 심각"했습니다. 그래도 "여성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았고, 한 번은 주일에 입고 오라고 바비에게 새 옷을 선물"했습니다. 그러나 "바비는 그 옷을 입고 진흙에서 뒹굴어 옷이 다 찢어졌고, 여성은 바뀌지 않는 바비로 인해서, 점점 지쳐" 갔습니다. 당시 "여성은 바비를 엄하게 책망도 하고 타일러도 보았지만, 바비는 잘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목사가 여성에게 '용기를 내서 포기하지 말고 계속 사랑하라!' 권해서, 여성은 그대로" 실천합니다.

 

그렇게 "끊임없는 사랑을 받았던 바비가 훗날, 중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며 헌신한 로버트 스미슨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힘들면 포기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우리 자녀가 내가 포기하는 모습과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모습 중 무엇을 통해" 배울까요? 삶은 "고난과 아픔의 연속이기에, 내가 받은 사랑으로 내 헌신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한주도 소극적인 나를 향해 주신 사랑을 선용해서 주변을 살리고 세워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