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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묵상(05) - 바벨론이 몰락한 이유(01).

다솔다윤아빠 2024. 8. 28. 00:48

@ 하박국 묵상(05-240707) 바벨론이 몰락한 이유(01, 하박국 2:5~11).

 

1812"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이 45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정벌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추위로 모스크바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불과 10, 전쟁 후 생존자는 4만 명뿐"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전쟁의 패배 원인을, '나폴레옹의 지나친 고집과 교만 때문이었다.'" 분석했습니다. 모두가 "'러시아 추위가 심각할 것이다.' 말했지만, 나폴레옹은 '강력한 프랑스군이 그 정도 추위에 물러서지 않는다.' 호언장담하다가 몰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건과 사고, 승리와 패배는 이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누구나 원하지 않는 몰락과 패망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고, 이에 상응하는 경고과 예측이 있었지만,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에 원인이" 있습니다. 따라서 "몰락과 실족을 이겨내고, 성공하고 번영하려면, 그 원인과 이유를 바르게 찾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박국은 "선민의 죄와 패역에 침묵하는 하나님께 항변했고, 하나님은 '심판이 있다.'"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더 악한 바벨론이 선민을 심판한다는 하나님 말씀에 다시 항변"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비록 바벨론이 잠깐 심판의 도구로 쓰였지만, 바벨론도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고, 특히 합 2장은 바벨론이 몰락한 이유 다섯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의 탐욕, 부당하게 추구하는 이익, 폭력으로 빼앗는 가혹한 수탈, 우상숭배"

 

이처럼 "바벨론은, 하박국의 항변처럼, 영적 육적인 죄악과 패역으로 심판을 받아서 몰락"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죄와 패역을 정확히 아셨고, '화 있을진저!' 강하게 책망하셨고, 마침내 B.C. 539, 고레스를 통해서 철저하게 심판"하셨습니다. 성경은 "바벨론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몰락을 통해, 선민도 똑같은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바벨론과 선민처럼 심판받지 않게 살아가라!' 경고"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몰락과 패망의 길, 번영과 성공의 길을 갈 때, 언제나 침묵하지 않고, 항상 동행하시며,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공과 번영을 원하면서, 몰락과 패망에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를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분명한 것은 "몰락과 패망을 이길 지혜와 비결은 하나님과 성경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벨론과 선민처럼 몰락하지 않고, 성공과 번영을 누리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시다.

 

바벨론의 몰락 이유는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욕심을 넓히며 족한 줄 모르고, 여러 나라와 백성을" 괴롭혔습니다. 여기서 "족하다. 이는 술과 음식을 과하게 먹고 느끼는 포만감, 필요 이상의 욕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 6절에서, 자기 소유가 아닌 것도 무겁게 볼모로 잡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타인의 소유를 모을지!' 책망할 정도로 과한 욕심으로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모은다. 원어는 그냥 모음이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너무 과하게 모았다는 뜻"입니다.

 

당시 "바벨론의 악행은, 모든 생명을 다 삼키는 죽음, 스올과"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바벨론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쓰임 받고 있음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과 백성을 극심하게 핍박하며 자기 욕심만" 채웠습니다. 마침내 "그렇게 지켜야 할 선을 넘어섰던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몰락"했습니다.

 

우리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데, 불행히도, 매사가 너무 잘 되면, 매사에 너무 힘들면, 선을 넘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14:13절은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말씀합니다. 마귀가 "심판을 받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핵심은 "하나님만 뭇 별 위에서 호령할 수 있었는데, 교만했던 마귀가 하나님 자리, 선을 넘어섰기에 심판받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영혼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믿음의 자리, 선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 안에서 살아갈 때 행복하지만, 욕심과 미혹, 교만함으로 선을 넘으면, 하지 말아야 하는 일, 하면 안 되는 일을 행하다가 실족"합니다. 기찻길은 "평행선인데, 만일 선로가 평행선이 아니면, 탈선으로 대형사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하나님과 우리도 평행선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항상 선을 지키며 우리와 동역"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을 넘어 영적으로 탈선하고, 타인을 실족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물론 인간관계, 신앙생활에서 선을 바르게 지킨다면, 몰락하지!" 않습니다. 실례로 "사람은 살면서 짜증이 나기도 하는데, 짜증이 선을 넘으면 분노가 되고, 더 선을 넘으면 인간관계와 내 신앙이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끊임없이 말씀을 받아야 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이유는 모두 선을 지키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가 넘어야 할 선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고 기뻐하시는 일은 과감하게 선을 넘어서라도 충성해야!" 합니다. 성령은 "선을 넘지 말라고 말씀하지만, 동시에 넘어야 할 선이 있다면 과감하게 넘어라!" 말씀합니다. 문제는 "분별력이 없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리고, 넘어야 할 선 앞에서 주저하며" 머뭇거립니다. 무엇보다 "믿음으로 넘어야 할 선을 넘지 않으면, 받을 은혜로부터 멀어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병이어 "사건 전, 빌립은 어린이가 가진 떡과 물고기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을 넘지 않겠다고 포기했지만, 안드레가 선을 넘어 오병이어를 주님께로 가지고" 갔습니다. 당시 "안드레가 믿음으로 선을 넘었을 때, 주님은 오병이어를 축사하셨고, 이로 인해 남성만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만일 "빌립이 선을 넘어서, 자기 생각대로 '모두에게 돈을 내라.' 소리쳤다면" 어땠을까요?

 

만일 "안드레가 믿음의 선을 지킨다고, 주님께 오병이어를 안 가지고 갔다면" 어땠을까요? 문제는 "우리가 넘어야 할 선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선을 지키며 살아가려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와 자족함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감사와 자족함이 없기에, 욕심과 교만에 빠져서 선을 넘고" 맙니다. 인간관계도 "자족함이 없기에, 비교와 오해로 선을 넘어서, 서로 힘들어지고" 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기에, 내게 필요한 것을 가장 선하고 알맞게" 채우십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필요해서 주신 것이고, 안 주셨다면 필요하지 않기에 안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감사와 자족함으로 내 믿음의 자리, 선을 지킨다면, 심판과 몰락에 빠지지!" 않습니다. 한주도 "하나님 주신 모든 삶에 감사와 자족함으로, 지켜야 할 선을 지키고, 동시에 믿음의 선은 넘는 지혜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바벨론의 몰락 이유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7절은 "바벨론에게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훗날 바벨론에게 박해받은 국가가 바벨론을 억누르기 위해 일어난다고, 괴롭히기 위해 깨어난다고, 그렇게 바벨론이 노략질했던 그대로 노략질을 당할 것이다." 말씀합니다. 이는 "그만큼 바벨론의 악행이 수많은 피를 흘렸고, 모든 주민을 힘들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바벨론이 주변 국가와 백성에게 행한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에 "본문 10절은,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바벨론이 뿌리고 행한 그대로 몰락할 것을" 말씀합니다. 어쩌면 "바벨론은 심판의 도구로 쓰일 때, '나는 영원히 몰락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다른 백성과 나라를 계속 모으고, 선을 넘어도 괜찮아!' 착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두렵지만 "몰락과 심판은 내가 행한 만큼, 내가 뿌린 그대로, 내가 심은 그대로" 되돌아옵니다. 생각할수록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내가 행한 그대로 똑같이 돌아오는지, 참으로 두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혹자는, 자신이 행한 일은 생각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뿌리든, 하나님은 항상 내겐 좋은 것만 주셔야 해!' 오해"합니다. 심지어 "혹자는 내가 뿌린 것, 내 부족함은 잊고, 항상 남 탓만 하고 원망하며, 책임 전가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떤 "목사가 열심히 설교하는데, 맨 앞에 앉은 청년이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에 계신 할머니는 열심히 말씀을 듣고 있어서, 목사가 그렇게 대조적인 모습을 보고 할머니에게" 말합니다. "할머니, 옆에 있는 청년 좀 깨워요!" 할머니는 "애꿎은 책망을 듣고 혼잣말을" 합니다. "재우긴 지가 재워 놓고, 왜 나보고 깨우라고 난리여!" 오늘 "우리가 몰락을 이겨내고 상급 받는 삶을 원한다면, 나부터 선한 씨앗을 뿌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룻기는 "모압 여인이 어떻게 다윗의 조상이 되는지를" 말씀합니다. 당시 "룻은 말씀을 전하거나 이적을 베푼 선지자가 아니었고, 국가를 구한 전쟁 영웅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며 선한 씨앗을 뿌리며" 살았습니다. 마침내 "모두가 모압 여인 룻을 인정하고, 훗날 다윗의 조부 오벳을" 낳았습니다. 이를 보면 "선한 씨앗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고, 삶에서 내가 믿음으로 뿌리는 선한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이에 "지금 내가 무엇인가 선하고 복된 일을 할 수 있을 때, 건강과 여건이 될 때, 더욱 하나님 기뻐하는 일에 헌신하며 선한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법칙은, 뿌린 대로 거둠이 당연하지만, 영적 법칙은 어떤 목적으로 씨앗을 뿌리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실례로 "선한 척, 가식적으로 뿌리는 씨앗이 어떻게 선한 열매를" 맺겠어요? 무엇보다 "내 이익과 선한 평가를 위해, 뿌리는 씨앗의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이 어떻게" 모르겠어요?

 

우리가 "선한 씨앗을 뿌리며 살아가려면, 항상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무장하여, 말씀에 순종하면, 내가 뿌린 씨앗이 얼마나 선하게" 맺힐까요? 동화작가 "최효섭 목사가 일본에서 장애인 시설을 방문해서,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 제일 힘든가요?" 여성이 "'환자를 목욕시킬 때요!' 답하자, '어떻게 이 일을 계속 감당하세요?' 묻자, 여성의 답변이 최효섭 목사에게 엄청난 도전을" 줍니다.

 

"힘들지만, 이 환자가 오늘 내게 오신 예수라고 생각하면, 찬송하면서, 주님과 대화하듯 이야기하며 목욕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목욕시키는 시간은 내 기도시간이고, 예배시간입니다." 물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씨를 뿌리는 삶이 힘들고 어렵지만, 어쩌면 가까운 시일에, 내가 선한 씨를 뿌리지 못하는 현실이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이에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기회 되는 대로, 감동되는 대로, 낙심하지 말고, 선한 씨앗을 계속 뿌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때로 선한 씨앗을 뿌려도 사람들의 오해와 비판도 있지만, 그래도 선한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이유는 "세상은 내가 선한 의도로 씨 뿌림을 잘 모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똑똑히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내가 뿌리는 선한 씨앗을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한주는 물론 평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씨앗을 계속 뿌리며, 몰락을 이겨내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