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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묵상(06) - 바벨론이 몰락한 이유(02).

다솔다윤아빠 2024. 8. 28. 00:48

@ 하박국 묵상(06-240714) 바벨론이 몰락한 이유(02, 하박국 2:12~20).

 

최근 "많은 대학생, 구직자, 직장인이 더 좋은 스펙을 쌓으려고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심지어 "성형 수술까지 받는데, 한국은 1000명에 8.9명이 성형 수술을 받았을 정도여서, 오프라 윈프리는 그런 한국을 '성형 천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실례로 "한국의 모 성형외과는 '부모님 날 낳으시고 원장님 나를 만드셨네!' 광고판도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을 가꾸고, 바꾸고, 포장하는 이유는 더 나아지고, 성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람은 모두 본능적으로 몰락과 심판보다 인정받고 성공하길" 원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성공과 인정을 원하면서, 그 답을 엉뚱한 곳에서" 찾습니다. 진정한 "성공과 번영은 세상과 사람이 아닌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하나님 주시는 답과 지혜로만 몰락과 심판을 이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우리는 세속적인 성공이 가진 한계를 알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박국이 "활동한 시기와 바벨론이 심판받은 B.C. 539년까지는 약 70년 차이가" 납니다. 하박국은 "70년 후 있을 바벨론 패망을 몰랐기에, 바벨론을 통해 선민의 우상 숭배와 불 신앙을 심판하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해서, 불평과 원망이" 컸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바벨론을 통한 심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하박국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바벨론도 패망할 것이다. 그들의 탐욕과 부당한 이익 추구, 수탈과 폭력, 우상 숭배를 심판할 것이다."

 

문제는 "당시 바벨론은 선민을 심판하고도 '왜 선민이 심판받는지, 왜 바벨론이 심판의 도구가 되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은 불과 70년 후, 심판으로 몰락"하였습니다. 문제는 "바벨론이 심판받은 다섯 가지 이유는, 선민도 똑같이 저지른 죄악이었고, 심지어 오늘 우리도 바벨론이 심판받은 이유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유는 "오늘 우리도 탐욕과 부당한 이익 추구, 수탈과 폭력, 우상 숭배가 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는 "과거 그 어떤 시대보다 성공과 번영의 기회가 많고, 이를 원하지만, 심판과 몰락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바벨론이 선을 지키지 못하고 넘었기에, 뿌린 대로 거둠을 몰랐기에 심판받았음을" 묵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바벨론이 왜 어떤 이유로 심판받고 몰락했는지' 또 다른 이유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바벨론의 몰락 이유는, 하나님께 받은 능력을 선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7절은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바벨론이 레바논과 그 모든 주민에게 행한 강포함을 언급하며, 훗날 바벨론도 행한 그대로 심판받을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서 "강포, '하마쓰는 폭력, 잔인함, 거짓, 흉악함이 넘치는 무법천지를 뜻하며' 바벨론의 악행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보여줍니다. 생각할수록 "당시 바벨론의 강포함이 컸다면, 이는 그만큼 힘과 능력,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 아닐까요?

 

문제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그렇게 강력한 힘을 주셨지만, 바벨론은 그 능력과 힘을 강포함으로 악용하였고, 선용하지 못해서, 훗날 바벨론도 페르시아의 강포함으로 똑같이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현대사회는 "과거와 비교해서 못 하던 것들, 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 줄어가고, 오히려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최근 "전화기는 눈동자, 얼굴과 지문으로 열고 잠글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은 비밀번호도 자주 잊어버리고, 심지어 사람을 직접 보고, 목소리를 들어도 잘" 모릅니다. 저도 "가끔 갑자기 전화를 받았는데 '접니다. 목사님.' 말하면, 정말 난감"합니다. 특히 "최근에는 AI를 통해 검색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가 쏟아져" 나옵니다. 문제는 "많은 것이 편해지고 나아졌지만, 여러분은 과연 이렇게 편해지고 나아진 것을 얼마나 선용하며" 사세요?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선하게 쓸 수 있고, 꼭 필요한 은혜를 한결같이 공급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주신 건강과 지혜, 물질과 믿음을 바르게 잘 쓰고" 있나요? 내게 "주신 은혜와 달란트로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곳과 실족하게 하는 곳, 어디에 더 많이" 쓰세요? 우리가 "은혜받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받은 은혜를 바르게 선용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영적 전쟁에서 크게" 이겼습니다.

 

문제는 "당시 선민은 엄청난 승리를 하고도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상을 숭배했고, 엘리야도 이세벨의 협박에 '나를 죽여달라.'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승리를 보고 듣고 체험하게 하셨지만, 그 은혜와 기회를 선용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기회를 선용하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게 "받은 은혜를 선용하지 못하기에 무기력과 불 신앙에 빠져 점점 세속화되어" 갑니다.

 

따라서 "우리가 심판과 몰락을 이기려면, 받은 은혜와 능력을 하나님 기뻐하는 곳에 선용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부터 '내가 받은 은혜와 달란트를 어디에 어떻게 쓸지!' 바로 찾아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매사에 선용한다면, 어느 누가 심판을" 받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선용보다 오용, 남용, 악용하며, 선을 악으로 만들며" 살아갑니다. 과거 "영국에서 청교도를 박해할 때, 국가의 허락을 받은 사람만 설교하게" 했습니다.

 

당시 "한 남성이 이 법을 어겨서 12년간 감옥에 있었는데, 그때, 아내는 구걸하며 비참하게 죽었고, 세 자녀는 고아처럼, 버려진 존재처럼 성장"했습니다. 남성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남은 인생을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너는 글을 써라. 나는 네게 글 쓰는 달란트를 주었어.'" 답하셨습니다. 남성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글이 훗날,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 간절한 기도보다 불평과 원망, 낙담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나 "기도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 성령께서 내 어려움과 아픔까지 선용할 지혜를" 주십니다. 힘들어도 "내가 잘 하고, 좋아하고, 타인에게 유익하고, 하나님 기뻐하는 일이 내 달란트인데, 달란트를 하나님 기뻐하는 곳에 선용하면, 내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달란트를 선용함보다 외면과 포기가 빨라서 성공보다 몰락에 빠질 때가 더욱" 많습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선용한다면, 내가 몰랐던 은혜까지도 더 받을 수" 있습니다. 이민자의 "삶이 버겁지만, 받은 것을 선용하면 새로운 만남과 기회, 성공과 번영이 이어질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혜와 달란트를 찾아서, 이를 바르게 선용함으로, 몰락과 심판을 이겨내고 성공과 번영을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2. 바벨론의 몰락 이유는, 바벨론이 한결같이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8절은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말합니다. 당시 "바벨론은 나무와 돌로 우상을 만들고, 금과 은으로 입혀서, 이를 숭배"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우상은 인간이 새겨 만들었고, 말도 못 하는 거짓 스승이다.' 책망"합니다. 바벨론은 "그렇게 열심히 우상을 섬겼지만, 그 유익함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자기가 직접 만들고서, '나무에 깨라고, 돌에 일어서라.' 말했던 것"입니다. 당시 "힘과 능력은 하나님께 받고서, 바벨론은 우상을 섬기고 의지"했습니다. 이에 "본문 14절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말씀합니다. 놀랍게도 "바벨론은 이미 세상에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함이 가득했지만, 이를" 몰랐습니다. 그렇게 "바벨론과 선민은,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여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우상이 나쁜 것임을 잘 알지만, 먼저 우상에 대한 정의와 개념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혹자는 "우상을 불상이나 인형과 나무, 해와 달, 짐승처럼 어떤 형상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처럼 피조물을 섬김이 우상 숭배가 맞지만, 진짜 우상 숭배는 하나님 대신에 무엇인가를 섬기고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묻는 것,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 때로 절대로 양보하지 못하는 것이 내 우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상은 유형일 수도 있지만, 교만함과 자존심처럼 무형일 수도" 있습니다. 우상 숭배의 "가장 큰 문제는, 우상은 절대로 내게 도움을 줄 수 없고,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상을 거부한다면서, 물질주의, 돈을 가장 깊이 숭배"합니다. 절박해서 "그렇겠지만, 지금도 혹자는 '복권 당첨을 위해 기도해달라.' 부탁"합니다. 심지어 "오늘 우리는 돈이라면 자존심과 신앙조차 뒤로 하고, 놓치면 안 되는 것으로 믿으며" 살아갑니다.

 

나아가서 "과학주의와 쾌락주의, 신념과 사상과 같은 이데올로기, 오락과 게임, 영화와 스포츠, 연예인 등, 실제로 찾아보면, 내 삶에 우상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 "자녀도 부모 생일은 몰라도 좋아하는 연예인과 그 부모, 가족 생일까지 외고" 다닙니다. 게다가 "누군가 내가 믿는 생각, 주장과 다르면, 타인을 공격하고, 차별하고, 전쟁까지도 불사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두렵지만 "현대사회는 과거 그 어떤 시대보다 우상이 가장 많은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씀을 멀리하고, 그래서 분별력을 잃고, 다시 새로운 우상을" 섬깁니다. 혹자는 "'현실이 이런데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요!' 항변하며, 거룩함을 아예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상을 극복하려면, 하나님 최우선, 하나님만 왕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20절은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의미는 "하나님은 천지에 편만하기에, 우리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해도 하나님 최우선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연약해도,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영혼을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깁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이방 문화가 가득한 중에도,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한결같이 '왕이신 하나님만 섬긴다!' 이런 믿음이 굳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만 왕으로 섬겼기에,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고, 사자 굴에 들어가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수많은 유혹, 영적인 도전과 박해 중에도,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왕으로 섬겼던 그들을 보호하시고 책임"지셨습니다. 문제는 "우리도 왕은 하나님밖에 없기에, '나부터 진짜 왕이 누군지' 바로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지금까지 거짓 왕을 섬기며 살았다면, 이제라도 내 진짜 왕을 바로 찾아서 섬겨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만 왕으로 섬긴다면, 이제라도 내 예배와 기도, 찬양과 헌신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게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내 영적 태도가 달라지면, 우리는 어떤 도전과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왕으로 삼고 살아가는가, 아닌가.' 이는 단순한 선택이 아닌 생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연약한 내가 몰락과 심판보다 성공하길 원하기에, 남은 삶이 항상 왕이신 하나님만 섬기며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