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강해/바나바

바나바 묵상(01) - 큰 은혜를 받고 요셉이 바나바로.

다솔다윤아빠 2024. 8. 31. 02:26

@ 바나바 묵상(01-240811) 큰 은혜를 받고 요셉이 바나바로(사도행전 4:32~37).

 

뉴저지에 "거주하는 우리는 조지 워싱턴, 화이트 스톤, 트로그넥, 마리오 쿠오모 다리를 자주 오고 가는데, 그 어떤 다리도 'Great, 큰 다리, 대교'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반면에 "수도권 한강에서는 일산대교부터 팔당대교까지 총 31개 다리가 있는데, 그중 '잠수교, 광진교, 잠실 철교만 빼고, 28개 다리 이름이 모두 큰 다리, 대교'"입니다. 게다가 "한국의 국호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 정부의 기관도 '대검찰청, 대법원' 큰 것을 선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더 크고 더 낫고 더 좋고 더 유익한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 것을 좋아한다고 내가 큰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정말 큰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 주시는 큰 은혜로, 내 영적 그릇이 더 커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채우시는 큰 은혜가 내 삶을 더 크고 복되게 바꿔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큰 은혜, 큰 사람, 큰 그릇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나바가 "부름을 받았을 때, 본문 33절은, 당시 초대교회 상황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당시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부활의 복음을 전해서,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큰 무리가 자기 것을 부인함으로 가난한 자가 사라질 정도"였습니다. 이런 "영적 환경에서, 바나바도 사도들이 전한 부활 복음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아서 그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반복하여 쓰인, '큰 메갈레는 그냥 큰 것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큼'을 뜻하기에, 오늘도 엄청난 규모를 메가톤급으로 표현"합니다. 메가톤은 "100만 배를 의미하기에, 1 메가톤은 10kg를 뜻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문제는 "바나바가 큰 은혜를 받음보다, '큰 은혜를 받고 그 삶이 어떻게 바뀌었나!'"에 있습니다. 실제로 "바나바의 위대함은 큰 은혜를 받았고, 이로 인해 그 삶이 새로워졌고, 받은 은혜가 더욱 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작고 사소한 은혜가 아니라 큰 은혜'로 말하지만, 실제 삶은 큰 은혜를 받음과 너무도" 다릅니다. 우리가 "큰 은혜를 사모한다면, 큰 은혜에 상응하는 책임과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나바가 받은 큰 은혜를 살피면서, 우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펴봅시다.

 

바나바는 큰 은혜를 받고, 그 삶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본문 36절은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 말씀합니다.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 '그는 더하실 것이다.'란 뜻으로, 라헬의 첫아들 이름과" 같았습니다. 라헬은 "언니 레아가 6명 아들을 낳을 때, 자신은 첫아들이어서 '아들을 더하소서!' 간절한 소망을 품고 이름을 요셉이라" 정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본인이 아닌 사도들이 요셉을 바나바 '위로의 아들, 파라클레이세스'"로 불렀습니다.

 

이는 "바나바가 큰 은혜를 받고, 자기를 위하던 삶이 타인을 진심으로 품고 위로와 이해로, 사랑하는 삶으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유대인이었던 바나바가, 훗날 안디옥 교회에서 수많은 이방인과 박해자 사울까지 품고 동역"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을 뜻하는 보혜사, 파라클레이토스와 바나바, 위로의 아들이 같은 어원임을" 아세요? 그만큼 "바나바가 큰 은혜를 받고, 그 삶이 성령처럼 위로와 이해가 크고 따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큰 은혜를 받았고, 영생을 선물로 받았다면, 그 이름이 바뀌어야!" 합니다. 여기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자세가 나 중심적인 삶에서 이타적으로 바뀜을" 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이기적인데, 그렇게 이기적인 삶이 항상 행복"했나요? 엄마가 "큰 초콜릿을 혼자 다 먹은 아이에게 '너는 형 생각은 안 해!' 책망"합니다. 이에 "아이가 울면서 '했어, 형이 오면 안 되는데, 계속 생각했어!'" 말했답니다.

 

문제는 "원하는 대로 다 하고, 내 욕심대로 채워지면 행복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십자가 보혈, 가장 큰 이타적 사랑으로 구원받았기에, 받은 은혜를 나눌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였소." 우리가 "이처럼 큰 은혜를 나만 알고, 나만 위해 쌓아두고 쓴다면, 이것이" 선할까요? 우리 "한 소망 교회가 너무도 귀하지만, 지역사회에 무관심하고, 우리만 행복하다면, 이것이" 선할까요?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데, '나는 큰 은혜를 받았어!' 말하며 인색하다면, 이것이" 선할까요? 성경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 하셨지만, 매일 내 편안함만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평생 믿는다면서, 받을 복만 계수하고, 나누지 못한다면, 이것이" 선할까요? 무엇보다 "우리는 인간이 직접 찾고 얻어서 누리는 복보다 나누고 베풀도록 주시는 하나님 복이 더 크기에, 받은 은혜가 클수록, 우리가 더욱 요셉이 아닌 바나바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매 맞고 옷이 벗겨져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 보인 반응이" 달랐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네 종류의 사람을 만나는데, 첫째, 강도처럼 '네 것은 내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삶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나만 잘 먹고 잘살면 그뿐인 삶의 태도"입니다. 둘째 "'내 것은 내 것'이라는 제사장 유형"입니다.

 

제사장은 "내가 해야 할 일만 생각하고, 타인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셋째 "'네 것은 네 것, 네 고통은 네가 감당해!'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레위 인 유형"입니다. 넷째 "'내 것은 네 것' 이타적 사고를 실천한 선한 사마리아인 유형"입니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전혀 몰랐고, 아무것도 받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알았지만, 큰 손해가 있었지만, 시간과 돈을 이타적으로 사용해서, 주님께 참된 이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문제는 "이타적인 사고와 삶은 또 다른 이타적인 삶과 사고, 인물이 계속 이어지게" 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 자체가 철저히 이타적이었고, 그 큰 은혜를 받은 성도의 이타적 헌신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고, 죄인인 나도 예수 믿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렵고 버겁지만, 그래도 큰 은혜를 받았기에, 이타적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이타적인 삶을 살아갈 때, 더 큰 은혜로 내 삶을 채워" 주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삶에서, 선택과 결정, 추구하는 것이 큰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이타적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성령님의 감동이 있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기적인 삶을 이타적 삶으로 바꾸어가야!" 합니다. 이민 생활이 "힘들지만, 요셉이 아닌 바나바로 큰 은혜를 받았기에, 이름과 삶의 태도가 더더욱 신실해지기" 원합니다.

 

2. 바나바는 큰 은혜를 받고,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습니다.

 

본문 37절은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값을 뜻하는 '토 크레마는 바나바가 자기 밭을 판 총액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바나바가 큰 은혜를 받고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어지는 행전 5장에는, 바나바와 달리, 총액을 숨기고 성령을 속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는 "그만큼 바나바의 헌신이 온전했고, 그 시작이 큰 은혜를 받음에 있었음을 도전"합니다.

 

당시 "바나바의 삶의 우선순위가 아나니아 삽리라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주석은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의 예배 처소를 제공했던 마가 요한의 삼촌이었다." 말합니다. 당시 "마가가 120명이나 모인 장소를 제공했다면, 바나바도 큰 부자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큰 은혜를 받고 우선순위가 바뀌면서, 삶의 태도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은혜를 받고서, 더는 물질과 세속적인 것보다 하나님 최우선으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선순위는 "지금 내 삶의 모습을 보여 주는 기준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척도"입니다. 많은 "학부모가 교회학교 발표회에서, 자녀가 가장 먼저 보임은 우선순위 때문"입니다. 저는 "장례식장에 가면, 가장 먼저 우리 교회 화환을 찾는데, 이 또한 우선순위 때문"입니다. 14:8절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말씀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크나큰 사랑을 받은 우리는 항상 사나 죽으나 하나님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도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큰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이 아니고, 그 큰 은혜를 너무 자주 망각"합니다. 여기서 "우선순위의 차이는 단순히 작은 차이가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차이"입니다.

 

다윗과 "사울은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로 등극해서, 똑같이 선민을 40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되고, 사울은 하나님 최우선보다, 자기 이익과 고집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무죄한 다윗을 죽이려 했고, 뜻대로 안 되면 신접한 여인까지" 찾았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언제나 한결같이 하나님이 최우선이어서, 마침내 예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 최우선이었기에,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 성전을 건축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최우선이었기에, 사울의 공격을 받아도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누가 정말 큰 은혜를 받았고, 누가 큰 은혜로 평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세요? 무엇보다 "하나님은 하나님 최우선의 인생을 절대로 외면하고 모른 체하지!" 않습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큰 은혜를 받고, 하나님 최우선으로 살아간다면, 그 은혜와 복이 얼마나" 클까요? 저는 "3 , 주일마다 도서관에 간다고 거짓말하고, 주일 예배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부모님이 제 거짓말을 아셨지만, 교회 가는 것을 막으면 엇나갈까 봐, 모른 척" 하셨습니다. 당시 "공부도 중요했지만, 주일 성수를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얼마 전 "새벽기도에서 황형식 목사님이 부모의 반대로 주일 예배 지키기가 많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번은 "주일인데, 어머니가 황형식 소년의 옷을 숨겼는데, 그래도 주일을 지키려고 속옷 차림에 교회에 갔고, 담임 목사에게 옷을 빌려 입고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들을 때 "가슴이 뜨거워졌고, 어린아이가 창피함도 잊고 속옷 차림으로 하나님과 예배 최우선을 지켰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그런데 "오늘날 모든 것이 너무도 자유롭고 편해졌지만, 이렇게 예배를 사모하는 영혼이 줄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최우선이 당연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해 달라고 변명과 핑계가" 많습니다. 그러나 "큰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 언행, 선택과 결정,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던 첫사랑의 때, 하나님 최우선을 결단했지만, 그 결단을 지키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1895"찰스 쉘던이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소설을" 썼습니다. 세상이 "힘들수록, 모든 선택과 결정에서, 삶의 순간순간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묻고, 주님을 최우선순위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한주는 물론 평생, 받은 큰 은혜를 지키며, 하나님 최우선으로 살아서, 바나바처럼 크게 쓰임 받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