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강해/바나바

바나바 묵상(03) - 하나님 주시는 더함의 은혜(01).

다솔다윤아빠 2024. 8. 31. 02:28

@ 바나바 묵상(03-240825) 하나님 주시는 더함의 은혜 (01 - 사도행전 11:22~26).

 

어떤 "마을에 천 원과 만 원을 주면, 꼭 천 원을 택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에 "누군가 '! 만 원을 받아야지.' 말하자, 아이가 '내가 만 원을 택하면, 누가 또 돈을 주겠어요?'" 답했답니다. 사람은 "누구나 더 많이 가지고 누리는 더함의 은혜를 원하면서, 더함을 위한 바른 방법을 잘" 모릅니다. 무엇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함이 가장 크고 온전하다고 고백하면서, 모두가 하나님 주시는 더함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모두가 더함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왜 더함의 은혜가 소중하고 필요한지' 그 이유도 모르고 무작정 더 많이 가지려"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더함의 은혜를 주셨지만, 이를 바르게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더함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세요? 또한 "더함의 은혜를 바르게 활용하며" 살아가세요? 본문 24절은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 후,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졌다.'" 말씀합니다.

 

당시 "안디옥은 예루살렘처럼 거룩한 도시가 아니라, 우상숭배가 극심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온 후, 안디옥이 영적으로 크게 달라져서, 큰 무리가 주님께" 더해졌습니다. 여기서 "'더해지다. 프로세테데는 더하다, 가입하다.' 교회 성장을" 뜻합니다. 또한 "수동태 동사로,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로 성도가 더해졌다.'" 말씀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 주신 더함의 은혜로,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설교를 듣고 삼 천명이 늘었을 때, 곳곳에서 구원받은 영혼이 늘어갈 때, 항상 프로세테데란 단어를" 썼습니다. 이는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고, 불신자가 복음을 영접함이 많아졌음을" 뜻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 주시는 더함의 은혜도, 이에 상응하는 원인과 이유, 우리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더함의 은혜를 모두가 아닌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만" 주십니다.

 

우리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더함의 은혜를 감당할지, 못할지' " 모르시겠어요? 더함의 "은혜는, 먼저 내 영적인 그릇이 더욱 커져야 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더욱 깊어져야, 풍성하게" 임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나바가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았기에, 본인과 안디옥 교회에 더함의 은혜가 크게 임했는지" 살펴봅시다.

 

더함의 은혜를 누리려면, 이방 땅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행전 11:19절은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말씀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후, 흩어진 성도가 안디옥 교회를 설립하자, 사도들은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로마의 3대 도시였고, 향락이 가득"했습니다. 게다가 "안디옥은 달의 여신, 아폴로, 음악의 신, 광명의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23절은, 바나바가 그토록 세속적인 도시, 안디옥에 도착한 후, 행적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현실은 "우상숭배와 향락이 가득했지만, 바나바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보았고, 영적으로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그렇게 하나님 은혜를 먼저 보았기에, '모두에게 굳건하게 주와 함께 머물라!'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어떤 관점과 시각, 무엇을 먼저 보는가!' 이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실제로 "부정적인 것만 보면, 매사가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어서, 그 결과가 선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것을 먼저 보면, 매사에 긍정적이고, 소망이 넘쳐나고, 삶의 열매조차 선하게" 바뀝니다. 항상 "삐딱한 아이가 목사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은 부자인데, 왜 하나님은 하씨, 예수님은 예씨인가?' 묻자, 목사가 당황했는데, 한 아이가 이렇게" 답합니다.

 

"서양은 성이 뒤에 있잖아! 하나님과 예수님 둘 다 ''씨니 부자 맞아!" 이처럼 "사람은 같은 환경에서, 어떤 시각과 관점으로 바라보는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비록 "똑같은 은혜를 받아도 혹자는 불평과 원망, 막힘과 부정적인 것만 보고" 살아갑니다. 마침내 "은혜가 아닌 것만 바라보고 선택하는데, 어떻게 삶에 더함의 은혜가" 있겠어요?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매사에 하나님의 은혜와 세상의 불합리 중, 무엇을 먼저" 바라보세요?

 

우리가 "어렵고 힘든 중에도, 억울함과 답답함보다 은혜를 먼저 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내가 영적으로 죽지 않고 살아야 하고, 실족하지 말아야 하고, 내 믿음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렵고 힘들다고 은혜보다 부정적인 것만 본다면 내 상처는 더 커지고, 마침내 하나님과 관계마저 깨지고, 주신 사명마저 놓친다면, 이는 철저하게 내 손해" 아닙니까? C.S. 루이스 "글에, 고양이 푸쉬가 영국을 방문하고, 주인과 대화 중"이었습니다.

 

주인이 "푸쉬! 영국에서 무엇을 보았니? 버킹엄 궁전? 웨스트민스터 사원?" 물었습니다. 이에 "푸쉬가 '여왕이 있는 런던에 갔었다.' 말하자, 주인이 '여왕을 만났는지!'" 물었습니다. 푸쉬는 "여왕이 있는 궁전에 가서, 여왕 의자 밑에 기어 다니는 생쥐를 보았어요!" 답했습니다. 고양이는 "런던 여행에서 고작 의자 밑의 생쥐만 보고 왔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중에, 누가 이 고양이가 어리석고 바보 같다고 자신 있게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은혜는 항상 실족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고난을 이기는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실례로 "문제만 바라보면 낙담하지만, 문제 뒤에 있는 하나님 은혜를 보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사를 하나님 은혜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먼저 찾고 바라보지!" 않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세 번 기도하자, 이를 시샘한 관리들이 다니엘을 죽이려 했고, 이로 인해 기도가 끊기고, 억울한 박해로 인해, 영적으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러나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도, 억울함과 고난보다 하나님 은혜를 먼저" 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아프고 힘들 때, 부정적 현실과 고난보다, 하나님 은혜를 먼저 볼 수 있다면, 반드시 더함의 은혜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보다 하나님 은혜를 먼저 봐야 함을 안다면, 이를 실제 삶에서 매번 훈련해야!" 합니다. 부정적 "환경에서, 하나님의 위로, 사랑과 은혜, 나를 용납하심을 먼저 보는 훈련을 한다면, 더함이 더 커지지!" 않겠어요?

 

다니엘과 "영적 거장들이 더함의 은혜를 누림은, 항상 하나님 은혜를 먼저 보는 훈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항상 선택의 연속인데, '세상을 바라볼지, 하나님 은혜를 바라볼지' 이는 철저하게 내 몫"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세상을 바라봐서 실패하고 실족했었기에, 이제부터라도 하나님 은혜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한주도, 남은 인생도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보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 주시는 더함의 은혜로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더함의 은혜를 누리려면, 성령님의 지배를 받음, 성령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본문 24절은 "안디옥 교회에 큰 무리가 더해졌고, 바나바가 착하고 성령 충만하였다." 말씀합니다. 충만하다. "폴레레스는 물이 가득 차서 넘치는 정도까지 이르렀음을" 말합니다. 이는 "바나바의 믿음과 언행, 사고와 삶을 성령께서 지배했음을" 뜻합니다. 게다가 "바나바는 그 성품마저 착해서, 안디옥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큰 감명을 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당시 모두가 성령 충만하지 않았고, 유독 바나바가 성령 충만했고, 그 결과 큰 은혜가 임해서 큰 무리가 더해졌다!" 말씀합니다. 만일 "바나바가 성령 충만하지 않았다면, 사도들이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바나바가 성령 충만하지 않았다면, 안디옥에 하나님 주시는 더함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바나바가 성령 충만하였기에, '모두에게 굳건한 믿음으로 주와 함께하라!' 권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지배하는 것에 의해 생각하고 판단함으로, 그 인생이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이 "지배하는 인생은, 매사에 ', ' 물질로 사람과 세상을 평가하며" 살아갑니다. 쾌락이 "지배하는 인생은 무엇을 해도 짜릿하고, 자극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갑니다. 그러나 "연약해도,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 삶에 하나님의 더하심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지배, 성령 충만함을 어떻게 정의하며" 살아가세요?

 

우리는 "어떤 특이한 현상, 특이한 목소리, 독특한 표현으로 말씀을 전하고, 방언과 통역의 은사를 행할 때, 성령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안 그럴 가능성이 더욱 큰데, 방언을 말하면서, 똑같이 범죄 하고 실족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령 충만은 성령님의 말씀과 은혜의 지배를 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함의 은혜를 받으려면, '내가 지금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지' 물어야 하지!" 않겠어요?

 

1972"스탠퍼드 대학 월터 미셸이 '마시멜로 실험'을 통해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여러 "어린이에게 마시멜로 1개를 주고, '15분을 먹지 않고 참으면 2개를 준다!'" 약속했습니다. 몇 명은 "15분을 못 참고 마시멜로를 먹었고, 몇 명은 15분을 참아서 두 번째 마시멜로를 받았는데, 핵심은 두 부류 어린이의 미래에 관한 비교"입니다. 15분을 "참았던 아이들은 SAT 성적과 학업 성취도가, 바로 마시멜로를 먹은 아이들보다 훨씬 더" 뛰어났습니다.

 

문제는 "어린이가 보이는 마시멜로와 나중에 주어질 상급 중 '무엇의 지배를 받았는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함을 알고 사모하면서, 현실은 이와 정반대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내 생각과 계획에 맞으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대의 경우, 성령은 사라지고, 내 고집과 주장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자기 생각의 지배를 받음으로 실패와 실족이 계속 이어졌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고" 살아갑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그늘 밑에 나아가서 내 짐을 풀었네!" 우리는 "찬송가 370장을 찬송하며, 주 안에 있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근심이 많은지, 왜 그렇게 생각이 변덕스러운지, 왜 그렇게 세속적인지' 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사울이 "악령에 시달려 힘들 때, 신하들이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수소문"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이 부름을 받아서, 힘들어하는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타며 위로"했습니다.

 

당시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은 직후"였습니다. 핵심은 "당시 사울이 힘들었던 이유는, 악령, 고민과 아픔이 사울을 지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성령님이 그 삶을 지배해서, 악기만 연주해도 주변에 평안함이" 넘쳤습니다. 당시 "사울은 왕이었고, 다윗은 무명의 목동이었지만, '누구의 지배를 받는가!' 이 차이점이" 컸습니다. 이에 "교회 직분과 믿었던 햇수보다, '누구의 지배를 받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어린이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형식적인 성도보다 훨씬 더 큰 더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인생의 운전대를 내가 아닌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주도 "악한 세상 속에서도 성령의 지배를 받음으로, 더함의 은혜를 받고, 날마다 영적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