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강해/바나바

바나바 묵상(06) ▶ 안디옥 교회의 탁월함(02 - 사도행전 13:1~3).

다솔다윤아빠 2024. 10. 16. 05:31

국어사전은 "탁월함을 남들보다 두드러지게 뛰어난 경우라고" 정의합니다. 따라서 "탁월함은 다수가 아닌 소수이고, 대다수 사람은 탁월함보다 평범함에 더 가깝고, 심지어 평범함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현실이 "이렇기에, 탁월함이란 단어는, 자연스럽게 경쟁과 비교를 내포하는 개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육학은 '탁월함을 어떤 결과와 목표가 아니라, 어떤 일과 상황을 대하는 각 사람의 태도와 자세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지금 내 영적인 태도와 자세, 일상의 자세와 태도에 따라서, 나는 탁월할 수도 있고, 탁월함과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탁월함은 이미 결정된 어떤 것이나 변하지 않고 바뀌지 않는 고정된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신앙과 삶의 태도와 자세에 따라서, 내 삶과 가정, 교회가 얼마든지 탁월하게 될 수" 있습니다. 행전 8:25절은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까지 확장된 후, 이렇게" 말씀합니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여기서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역을 마치고, 땅끝으로 더 나아가지 않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당시 복음을 들고 땅끝을 향했던 주체는 사도가 아닌 익명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게다가 "놀랍게도, 예루살렘 교회가 아닌 안디옥 교회가, 주님의 직접적인 사도가 아닌 바나바와 바울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파송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보다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과 헌신이 두드러지고 뛰어났던 것"입니다. 마침내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란 호칭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한 이후, 사도행전의 축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넘어갔습니다. 이는 "그만큼 안디옥 교회와 그 성도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가, 그 어떤 교회보다 간절하고 뜨거웠고, 가장 두드러지고 뛰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탁월함이 "삶의 태도와 자세, 영적 태도와 자세로 결정된다면, 나는 물론 우리 교회도 얼마든지 두드러지고 뛰어나게, 탁월하게 하나님을 높이며 헌신할 수 있고, 더 많은 열매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디옥 교회가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졌기에, 그렇게 탁월할 수 있었는지, 오늘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살펴봅시다.

 

1. 안디옥 교회의 탁월함은, 간절함으로 성령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자세와 태도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하면서, 보여준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먼저 "'주를 섬겨' 마치 구약의 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기듯 경건함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금식하며'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 육체적 원함을 포기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말씀합니다. 그렇게 "간절함으로 기도했고,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하고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런데 "행전 1:24절은, 유다 대신 사도를 세울 때, 그들이 기도하여 이르되" 말씀합니다.

 

당시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새로운 사도를 세울 때, 놀랍게도, 금식과 섬김 없이 기도만" 있었습니다. 이를 보면, "안디옥 교회가 얼마나 간절함으로 두 사도를 세워서 파송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복음을 증거 함에 진심이었고, 하나님 은혜를 사모했고, 성령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며, 선한 열매를 맺기 원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뜻을 먼저 구했기에, 안디옥 교회는 소아시아 그 어떤 교회보다 탁월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내 뜻과 성령의 뜻 중, 매사에 하나를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성령의 뜻을 먼저 구하지 않으면서, 내 뜻을 성령의 뜻이라고 착각할 때도" 많습니다. 저는 "이번 집회에서, 레너드 스윗의 도전, '예수를 성령에 의해서 재발견해야 한다.' 이 말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는 "오래 믿었다면서, 예수가 누구인지 배워서 알고 있다면서, 문제는 내가 아는 예수, 그 수준에서 멈춘 채, 더는 성장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탁월하려면, 선교적 삶을 살아가려면, 성령에 의해서 예수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이는 "삶의 모든 순간마다, 내 의지와 뜻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진짜 예수를 발견하여 탁월하게 될 수 있다는 도전"입니다. 고전 3:16절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말씀합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기에, 내가 물으면, 항상 가장 바르고 옳은 답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내 언행과 삶이 누구를 좋게 하는지, 나와 교회 중 무엇이 먼저인지, 하나님과 세상 중 누구를 기쁘게 하는지' 계속 물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께 구해서 그 음성을 듣는 태도와 자세가 내 삶과 신앙을 탁월함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의 박해로 밧모섬에 유배된 후,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당시 "도미티안은 '내가 신이야! 나를 숭배해야 해!' 강요하며, 기독교인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에서, 성령의 음성을 먼저 찾고, 들은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당시 "요한도 인간이기에,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이 힘들어서, 타협하며 편리함을 찾을 수도 있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박해가 심해질수록, 더더욱 성령의 음성을 찾고 구하는 태도와 자세로, 요한은 낙담과 실족을" 이겨냈습니다. 그렇게 "계속 성령의 음성을 먼저 구하고 찾고 들어서, 박해받던 수많은 초대 교회 성도를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음성을 먼저 구하고 찾고 듣는 자세와 태도가 요한을 탁월하게" 만들었습니다. 핵심은 "힘들수록, 성령의 음성을 먼저 찾고 구하고 들으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여십니다. 반면에 "어렵다고, 나와 세상의 음성을 먼저 찾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선하겠습니까? 2001"5월에 한동대 김영길 총장이 업무상 횡령 등으로 법정에서 구속된 이후, 이에 대한 한동대 학생과 학부모의 대응은 참으로 영적이고, 세속적이지" 않았습니다.

 

무려 "1,500여 재학생과 300여 학부모가 30여 대 버스를 타고, 경주교도소에 도착"했습니다. 모두가 "적법하게 질서를 지키며 스승의 노래를 부르고, 간절히 기도했고, 축복 송을 부르며 옥중의 스승을 응원"했습니다. 이에 "김영길 총장도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분노를 품지 말고 공부에 최선을 다하라!' 격려"했습니다. 당시 "한동대 재정이 크게 어려웠는데, 이 내용을 듣고, 수많은 교회와 성도가 학교를 위해서 헌금"했습니다.

 

훗날 "혹자는 '총장님이 감옥에 조금 더 있었으면, 재정이 더 좋아졌을걸!'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민 생활이 "힘들고 버겁지만, 성령의 뜻을 먼저 찾고 구함이 문제를 해결하고, 부족하고 평범한 나를 탁월한 영적 거장으로 바꾸어 갈 것"입니다. 한 주를 "시작하며, 먼저 성령의 뜻과 은혜를 구하고 찾는 탁월함으로 승리하길" 소원합니다.

 

2. 안디옥 교회의 탁월함은, 최고의 것을 드리는 순종하는 자세와 태도에 있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성령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말씀합니다. 이어서 "본문 3절에서, 안디옥 교회는 금식과 안수 기도 후, 두 사도를 파송"했습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 사역자 다섯 중, 바나바와 사울은 처음과 끝"이었습니다. 특히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를 대표하였기에, 어쩌면 다른 사역자를 파송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교회에서 가장 소중한 인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렇게 "안디옥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 최고의 손해를 감내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맨 끝이었지만, 사울은 바울이 되어, 훗날 바나바보다 훨씬 더 힘있게 헌신"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은 안디옥 교회의 대표 격인 바나바, 엄청난 영적 잠재력을 가진 사울을 선택하셨고, 안디옥 교회는 이에 순종함으로 탁월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 내가 가진 최고, 최상의 것을 드림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 부모는 헌금을 드릴 때, 새 돈으로 바꾸거나 다림질로 펴서" 드렸습니다. "돈과 헌 돈, 다림질하건 안 하건, 드리는 헌금 액수는" 같습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할 수 있는 최고, 최상의 것을 드리려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헌금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와 우리 교회는 최고,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팬더믹 후 "일상화된 온라인 예배는 우리 신앙을 타협하는 신앙으로, 활력을 잃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주인이고, 천지의 주관자라면서, 최고, 최상의 것을 드림과 점점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최고, 최상의 것을 드리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어요? 오히려 "최고, 최상의 것을 드리지 못함으로, 내 신앙과 삶이 탁월함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은 "22:2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아들, 사랑하는 독자, 웃음의 근원이 됨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면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최고, 최상의 존재를 하나님께 드린 이후, 22: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존재, 최고, 최상을 드린 아브라함을 메시아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마다 "가장 소중한 것, 최고, 최상의 것을 드림이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드린 최고, 최상의 것을 통해, 탁월함을 허락해" 주십니다.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는 은혜,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이 땅과 내세의 온전한 은혜를" 채우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은혜로 살아, 하나님밖에 없어.' 말하지만, 하나님께 최선을 다함이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내게 최고, 최선, 가장 좋은 것을 주셔야지!" 생각합니다. 만일 "배우자가 '네 것도 내 것, 내 것은 내 거야!' 말하면" 어떨까요? 탁월함은 "내가 최고, 최상의 것을 드릴 때, 하나님 주시는 갚으심과 은혜"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악기를 연습하는 어린이 157명을 9개월 관찰했는데, 그 실력 차이가 계속" 벌어졌습니다.

 

심리학자는 "아이들의 실력이 달라졌던 원인을, 처음 아이들에게 물었던 질문에서" 찾았습니다. "너는 음악을 얼마나 할 거니?" 이에 "아이들의 답변이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1년만 하고 그만둘 거예요, 고등학교 졸업까지만 할 거예요, 평생 할 거예요!" 당연히 "1년만 하고, 고등학교 졸업까지만 할 아이, 평생을 할 아이의 태도와 자세가" 달랐습니다. 신앙생활은 "1년만, 일정한 나이까지만 할 것이 아니라, 천국까지 평생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내 신앙생활과 미래가 탁월해서 많은 은혜와 간증을 누리기 원한다면, 나부터 최고, 최상의 것을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정확하신 분이기에,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최고, 최상의 것을 드리는 마음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내가 드린 최고, 최상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한 은혜를 채워"주십니다. 한주도 "이왕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최고, 최상의 것을 드리며, 탁월함을 선물로 받아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