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특새/2023 마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2023 사순절 마가의 발자취(22) - 살과 피를 주신 은혜로 살아가기에.

다솔다윤아빠 2024. 8. 2. 01:07

@ 2023년 사순절 특새(22-230318) 살과 피를 주신 은혜로 살아가기에(14:22~31).

 

* 익명의 "율법사가 주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자, 주님은 마 22:37~39절에서 이렇게" 답하셨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 주님은 "사랑하되, 마음과 목숨, 뜻을 다해, 또한, 6:5절은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다.

- 이처럼 "사랑은 온전해야 의미가 있기에, 만일 배우자가 '나는 당신을 99% 사랑해!' 말하면 마음이" 어떨까?

 

* 대부분 "99%에 감격하기보다, 1% 사랑이 어디로, 누구를 사랑하는지 물으며 불쾌할 수도 있지!" 않을까?

- 그래서 "혹자는 '큰 기쁨의 반대말은 약간의 기쁨이고, 큰 성공의 반대말은 작은 성공이다!'" 말했다.

- 마찬가지로 "사랑은 온전해야 참사랑이지, 마음과 목숨, 힘과 뜻을 다하지 않은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다.

- 주님께서 "떡을 떼시며 내 몸이라고, 잔을 주시며 내 피라고 말씀하며, 제자들과 성찬식을" 가지셨다.

- 여기서 "떡과 잔, 주님의 몸과 피는 주님의 일부가 아닌 전부, 마음/목숨//함을 다하여 주신 사랑"이었다.

 

*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제자들은 주께서 주시는 떡과 잔, 주님의 몸과 피가 가진 의미를" 몰랐다.

-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 장담하며 겸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문제는 "오늘 우리도 주님 주신 떡과 잔, 살과 피로 구원을 받았지만, 제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이유는 "당시 제자들이나 우리나, 주님께서 전부를 주신 사랑과 은혜를 온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 들어서 "알고, 익숙하지만, 주님 주신 살과 피가 얼마나 큰 사랑인지, 깊이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연약한 내가 존귀한 이유는, 주께서 살과 피, 전부를 희생하고 나를 죄와 죽음에서 살리셨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8:38절 말씀처럼, 사망과 생명, 천사들과 권세자들,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존귀한데, 주님께서 전부를 주신 사랑을 모르기에 악한 세상에서 넘어지는 것"이다.

- 사순절 "22일째, 주님께서 전부를 주신 사랑으로 우리가 살았기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보자!

 

주님을 기념하며 살아가려면, 내 삶과 언행에서 예수가 보여야 한다.

 

* 1224"성 프랜시스가 아시시, 라 베르나 산에서 40일 금식 기도 중, 천사가 다가오는 환상을" 체험했다.

- 프랜시스가 "자세히 보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천사가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있었다.

- 그런데 "놀랍게도, 프랜시스도 천사들의 아픔과 고통을 느끼며, 몸에 그리스도의 오상(五傷)" 새겨졌다.

- 주님의 "두 손에 박힌 못, 두 발에 박힌 못처럼 통증이 있고, 심지어 옆구리에서 서서히 피가 흘러" 내렸다.

- 로마 가톨릭은 "이를 성흔(聖痕, Stigmata)로 말하며, 가장 거룩하고 신비한 은혜로" 해석한다.

 

* 이처럼 "성흔은, 바울이 갈 6:17절에서 고백한 내용,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 우리는 "성흔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프랜시스의 경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예수처럼 살았고, 얼마나 예수를 사랑했고, 그 삶에서 얼마나 예수가 명확히 보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 이처럼 "성경은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은 사람은, 세상에 살아계신 예수를 보여주며 살아가야 함을" 도전한다.

 

* 본문 26절은 "(제자들이 주의 살과 피를 받은 후)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 말씀한다.

- 당시 "제자들은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은 후, 찬미하여, 하나님을 높이며 감람산으로" 올라갔다.

- 그러나 "이들은 주님의 살과 피의 가치와 의미를 몰랐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다.

-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 전부를 주셨지만, 제자들은 주님을 세상에 보여주기는커녕, 욕보이고 말았던 것"이다.

- 실제로 "주님은 겸손하셨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살과 피를 받고도, 허세와 호언장담에 빠지고" 말았다.

 

* 게다가 "제자들 모두,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고" 말았다.

-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 죽음 후, 두려워서 문을 잠가야 할 정도로, 담대함과 용기까지도" 잃었다.

- 한 마디로 "제자들은,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았지만, 그들은 주님을 세상에 전혀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 그러나 "성령을 체험한 후, 제자들은 담대하게 주님의 살과 피로 받은 은혜를 세상에" 보여주었다.

- 이를 보면, "살과 피를 받은 은혜는, 성령을 체험해야, 악한 세상에서 주님을 보여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 유사해 "보이지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과 무엇인가가 보이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 만일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주신 사랑을 받으면, 내 표정과 언행에서 예수가 보이고 나타나야!" 된다.

- 반면에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받고도, 그 가치를 모르면, 아무리 주님을 보여주려 해도 가식처럼" 보인다.

- 그러므로 "기독교인인 우리는 성령님의 은혜로, 주님의 살과 피가 바로 나를 위한 은혜임을 체험해야!" 한다.

- 그렇게 "주님의 살과 피가 내게 주신 은혜가 되면, 내 삶에는 나도 모르게 예수가 보일 수밖에" 없다.

 

*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을 보면, 주님께서 공생애 때, 행하신 이적을 그대로 행하고" 있다.

- 둘 다 "병자를 치유하고, 말씀을 전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베풀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보였다.

- 핵심은 "둘 다 주님의 살과 피로 받은 은혜가 너무도 컸기에, 삶에서 자연스럽게 주님이 보였던 것"이다.

- 둘 다 "주님의 살과 피로 받은 은혜가 너무 깊어서, 말과 행동, 선택과 결정에서 예수가" 나타났다.

- 그래서 "둘이 가는 곳마다 주님의 은혜가 임했고, 수많은 영혼이 주님의 살과 피로 주시는 은혜를" 받았다.

 

* 우리가 "버거운 이민 생활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내 언행과 삶에서 주님이 보이고 나타나야!" 한다.

- 이유는 "내 삶에서 예수의 사랑과 은혜가 보여야,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 대다수의 모습에서, 예수를 사랑한다면서, 예수가 보이지!" 않는다.

- 그렇다면 "오늘 이 아침, 과연 내 언행, 선택과 결정에는 주님의 살과 피로 받은 은혜가" 보이는가?

- 사순절 "22일째, 오늘도 우리 삶에서 주님의 살과 피로 받은 은혜가 보이고 나타나서 승리하기" 원한다.

 

2. 주님을 기념하며 살려면 나부터 장담하지 말고 항상 겸손함으로 살아가야 한다.

 

* 천국에 "목사와 집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는데,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일어나서, 집사를 칭찬하며 '믿음을 지키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 환영하셨지만, 목사에게는 '수고했다!' 시큰둥하게" 말씀하셨다.

- 조금 "억울했던 목사가 '하나님! 저도 천국에 왔는데, 왜 이렇게 차별을 하세요!' 불평을" 했다.

-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보좌에서 일어나 너를 칭찬하면, 네가 내 자리에 앉을까 봐 그랬다!'" 답변하셨다.

- 많은 "목회자와 기독교인이 주님처럼 목회하고 살아가겠다고 하지만, 겸손을 잃고 교만에 빠질 때가 너무" 많다.

 

* 과거 "전임 사역 처음 시작할 때, 섬기던 교회 담임이 워싱턴 중앙 장로교회 이원상 목사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 "목회를 잘 감당하려면, 두 가지 필요한데, 하나는 똑똑하기보다 바보가 되세요! 그리고 항상 기도하세요!"

- 오늘의 "문제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기독교인 다수가 겸손보다 교만과 장담에 빠져 실족할 때가 참으로" 많다.

- 더 큰 "문제는 장담과 교만이 틀렸음을 알지만, 죄인인 인간은 이미 빠진 장담과 교만에서 그대로" 살아간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살과 피를 주심은 내가 교만과 장담에 빠져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 주님은 "본문 27절에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말씀하셨다.

- 이에 "베드로는 본문 29절에서,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호기롭게" 장담했다.

- 문제는 "본문 31절은,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같이 말 하니라.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가 장담했다고" 증언한다.

- 주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말씀하셨을 때와 정반대로, 모두가 기고만장해" 있었다.

 

* 그러나 "안타깝게도, 장담했던 베드로는, 장담한 바로 그 날 밤, 주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하고" 말았다.

- 게다가 "다른 제자들도 도망갔고, 두 제자는 엠마오로 귀향하고, 일부는 다시 어부로" 돌아갔다.

- 훗날 "제자들이 주님의 살과 피를 받고도, '나는 안 버립니다. 안 떠납니다.' 호언장담하고도, 이처럼 허무하게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길, 부인한 일을 생각하면, 얼마나 죄송하고,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 이처럼 "연약한 인간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에, 그저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의무만" 있다.

 

* 그러나 "오늘 우리는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며, 장담하고 큰소리치는 경우가" 많다.

- 그래야 "내가 타인보다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된다는 착각과 세속적 생각이 너무도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 실제로 "한국의 교육 현장을 보면, '얼마나 큰 집인가! 얼마나 좋은 차인가!'로 사람을 차별"한다.

- 그래서 "한국의 청년 중, 일부는 소득의 90% 이상을 투자해서 좋은 차를 타는 Car-Poor 족이 많다고" 한다.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허세와 장담보다, 연약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 붙들고 살아가길" 원하신다.

 

* 삭개오가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 후, '토색 한 것을 네 배로, 재산 절반을 내놓겠다!'" 고백했다.

- 어쩌면 "삭개오는 여리고에서 최고 부자였지만, 주님 앞에서 기고만장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었다.

- 주님은 "아직 주님의 살과 피를 받지 않았던 삭개오의 겸손을 보시고, 19: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이처럼 "주님은 주님의 살과 피를 받고, 겸손해진 영혼에게 영생, 구원, 천국을" 허락하신다.

 

* 그런데 "오늘 우리는 '겸손하면 바보가 되고, 무시당하고, 사람다운 대접을 못 받는다.'"라고 생각한다.

- 악한 "세상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높이시고" 사용하신다.

- 나아가서 "주님은 겸손에 반드시 하늘의 복을 채우셔서, 절대로 세상에서도 무시당하게 방관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해도, 주님의 살과 피를 받은 사람답게, 겸손해야!" 한다.

- 사순절 "22일째, 겸손함으로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며 승리하는 복됨이 있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