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특새/2023 마가의 발자취를 따라서

2023 사순절 마가의 발자취(33) - 역시 믿지 아니하더라.

다솔다윤아빠 2024. 8. 3. 02:21

@ 2023년 사순절 특새(33-230331) 역시 믿지 아니하더라(16:9~13).

 

* 일반적으로 "독일인은, 물건을 살 때 '얼마나 오래 쓰나요?' 묻고, 일본인은 '이것이 신제품인가요?'" 묻는다.

- 반면에 "한국인은 '이것이 진짜예요?' 묻는데, 생각할수록, 얼마나 가짜에 속았으면 이렇게" 물을까?

- 실제로 "참기름이란 말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데, 앞에 진짜, , 100%를 넣어야, 그래도 안심"한다.

- 심지어 "언어 습관에서도, 한국인은 '진짜로, 사실은, 진심으로, 찐으로!'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 이유는 "그만큼 한국인 심령에 불신에 대한 두려움, 불신이 깊이 내재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래서 "어쩌면 세상과 불신자는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을 향하여,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지!" 않을까?

- "당신네 교회는 진짜 참 교회인가요? 당신은 진짜, 참 기독교인인가요? 혹시 가짜 아닌가요?"

- 2:8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씀하며,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다!'" 강조했다.

- 그러나 "오늘의 문제는 인간관계에서, 하나님과 관계에서, 믿음보다 불신이란 단어가 더 많아지고" 있다.

 

* 본문은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셨고, 막달라 마리아가 이를 전했지만, 모두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 본문 11절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말씀한다.

- 그런데 "본문 13절은,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말씀한다.

- 안타깝게도, "불신자도 아니고, 유대 종교지도자도 아니고, 주의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 문제는 "그렇게 모두가 믿지 않았기에, 그들은 도망갔고, 숨었고, 믿음의 자리를 떠나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 기독교는 "믿어야 능력이 있기에, 십자가 복음, 부활 복음,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야!" 한다.

-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인간의 이성과 배치되면, 믿기보다 분석하고, 거부하고 배척하려!" 한다.

- 그렇게 "점점 믿지 않음으로 인해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미래가 모두 불안함으로 쌓여가는 것"이다.

- 그렇다면 "여러분은 '정말 복음을 믿는지, 혹시 믿는 척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야!" 한다.

- 사순절 "33일째, 우리가 주의 제자들처럼 쉽게 빠지는 불신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겨낼지!" 살펴보자!

 

불신은 이미 받은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75세의 아브라함을 불러서, 175세에 불러가기까지, 끊임없이 말씀과 도전을" 주셨다.

- 때로 "아브라함이 실수할 때도, 실족하고 실수할 때도, 항상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계속 반복해서 말씀을" 주셨다.

- 그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때마다 일마다 받으면서, 말씀을 더 깊이 기억하며 살 수" 있었다.

- 또한 "그렇게 기억된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직접 체험하는 은혜까지도 참으로" 깊었다.

 

*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해주시고, 말씀대로 살아서,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았다.

-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도 성령님을 통해서 계속 가르쳐주고 생각나게 하심을" 아는가?

- 하지만 "우리는 이미 받은 말씀,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도 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쉽게 잊고" 살아간다.

- 이처럼 "받은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당연히 삶에서 깨달아지는 정도와 깊이가 얕아질 수밖에" 없다.

- 문제는 "그렇게 말씀을 쉽게 잊고 깨달음이 줄어가는데, 어떻게 내 믿음이 더 굳건해질 수" 있겠나?

 

* 본문 10절은 "(주님이 죽은 후) 제자들이 슬퍼하고 울고 있다가, 부활의 소식을 들었다." 말씀한다.

- 당시 "제자들에게 가장 큰 복음은 주님을 다시 볼 수 있고, 다시 동역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 그러나 "그들은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고, 반가워하지 않았고, 그래서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 도대체 "왜 그렇게 기다리고 갈망하던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제자들이 이를 믿지!" 않았을까?

- 당시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에 관한 메시지를 처음 들어서, 생소한 개념이" 아니었다.

 

* 오히려 "주님은 공생애 때, 제자들에게 부활에 관해 여러 번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이 이를 잊었던 것"이다.

- 그들은 "능력을 베푸시는 주님이 계속 자신들과 함께할 것을 꿈꾸며, 부활의 메시지를 잊고 깨닫지!" 못했다.

- 만일 "당시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신중하게 깊이 들었다면,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 이처럼 "말씀을 들음보다 '얼마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마음에 새겨 기억하고 깨닫는가'가 더 중요"하다.

- 이유는 "내가 말씀을 기억하고, 깨달아야, 그 말씀이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 오늘 "우리의 문제는 말씀을 쉽게 많이 접할 수 있지만,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지 않고" 살아간다.

- 그만큼 "중요성, 갈급함과 사모함이 없고, 언제나 말씀을 쉽게 들을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 때문"이다.

- 그러나 "오늘 우리가 정말 불신을 넘어 확신으로 들으려면, 지금 듣는 말씀을 마지막 말씀처럼 들어야!" 한다.

-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내게 마지막으로 준다고 하면, 우리가 말씀 앞에 서는 태도가" 어떨까?

- 마지막 "말씀이라면, 늦을 수 없고, 졸 수 없고, 외면할 수 없고, 절대로 소홀히 할 수도" 없다.

 

* 목사인 "저는, 성도의 임종을 자주 보는데, 임종을 맞는 분을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있는 공통점이" 있다.

- 가족의 눈빛이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간절함, 더 깊이 기억하겠다는 사모함으로 임종을 맞는 가족을" 본다.

- 혹시라도 "임종을 맞는 가족이 뭐라고 하면, 귀를 가까이 대고, 간절한 마음으로 들으며 최선을" 다한다.

- 물론 "약간은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유언처럼 듣는다면" 어떨까?

- 실제로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말씀을 듣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처럼 말씀 한 번 들음이 소원임을" 아는가?

 

* 10:17절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한다.

- 여기서 "들음은 소리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새기며 듣는 것이고, 그래야 불신에 빠지지!" 않는다.

- 불신을 "이기는 힘은 인력과 노력이 아니라, 말씀을 얼마나 사모함으로 듣고 깨닫는지와 비례"한다.

- 사순절은 "하나님 말씀을 집중해서 듣고, 마음에 새겨서 기억하고, 더 깊이 깨달아 가는 시기"이다.

- 바라기는 "이번 사순절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깊이 깨달아서, 확신으로 불신을 이겨내기를" 원한다.

 

2. 불신은 슬픔에 빠져서 지켜야 할 믿음과 사명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 과거 "여러 목회자가 남한산성에 거하시던 한경직 목사를 찾아가서, 목회에 필요한 덕담을" 요청했다.

- 한경직 "목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 말씀하셨다.

- 당시 "많은 목회자가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 깊고 큰 깨달음과 도전을" 받았다.

-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목회자도,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도, 믿음의 자리를 이탈할 때가 많고, 예수를 잘 믿기보다, 예수를 잘 믿지 못하고, 하나님 영광을 가릴 때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 실제로 "최근 어떤 보고서는 '교회 문제의 70%가 담임 목사로 인해 발생한다.'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 이를 보면, "정말 목사부터, 교회 장로부터, 안수집사부터, 권사부터 예수 잘 믿어야 하지!" 않을까?

- 그러나 "'예수 잘 믿으세요!' 이 말은 교회 중직자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을 향한 하나님의 도전"이다.

-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얼마나 예수를 잘 믿으며, 내게 주신 믿음의 자리를 잘 지키고 있나!' 확인해야!" 한다.

 

* 본문 10절은 "당시 부활 소식을 접한 제자들이 슬퍼하고 울고 있는 중이었다!" 말씀한다.

- 불과 "얼마 전까지도,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죽겠다!' 말할 정도로 의욕과 자신감이" 넘쳤다.

- 그러나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제자들이 주님의 죽음 후, 모두 소중한 믿음의 자리를 잃고" 말았다.

- 그래서 "호언장담이 두려움이 되었고, 당당함이 숨어서 문을 잠가야 하는 위축으로" 바뀌었다.

- 본문 12~13"내용은,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를 축약한 것"이다.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24:16절에서,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지 못했다!'" 말씀한다.

- 여기서 "제자들과 엠마오로 간 두 제자의 공통점은, 말씀을 듣고도 잊어서, 지켜야 할 자리도 놓치고" 말았다.

- 그렇게 "있어야 할 자리를 잃었기에, 그들은 두려웠고, 과거 주님을 만나기 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 그렇게 "믿음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기에, 그들은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이를 믿지!" 못했다.

- 그러나 "역설적으로, 훗날 주님의 부활을 믿은 후부터, 그들의 더욱 힘있게 믿음의 자리를" 지켰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과 교회, 가정에서, 무엇인가를 감당하기 위해서 소중한 청지기 자리를" 주셨다.

- 물론 "어떤 자리는 편안하게 지킬 수 있지만, 어떤 자리는 부담스럽고, 지키기가 버거울 수도" 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자리를 주심은, 그 자리를 믿음으로 지켜서, 선한 열매를 맺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오늘 우리는 슬픔과 낙담으로, 실족과 상처로, 다양한 이유로 믿음의 자리를 이탈하고" 있다.

- 그러나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사명자 자리를 이탈하면, 당연히 믿음을 잃고, 천국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 선민이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이유는, 선민 공동체가 믿음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 특히 "아론은 자신이 영적으로, 공동체서 어떤 자리에 있는지 몰랐고, 마침내 모두를 타락으로" 이끌었다.

- 나아가서 "선민도 애굽의 10가지 재앙, 홍해 사건을 체험했지만, 그들은 있어야 할 영적 자리를" 몰랐다.

- 그러나 "당시 모세 한 명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자리를 지켰고, 마침내 십계명을 선물로" 받았다.

- 생각해 보면, "모세 한 사람이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킬 때, 공동체 전체를 다시 살려낼 수" 있었다.

 

*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서 계획하고 하시려는 일, 내가 꼭 지켜야 할 자리, 그것이 바로 소명이고 사명"이다.

- 부족해도 "내가 하나님 주신 소명만 잘 지켜도 내 삶과 주변 모두가 곁길로 빠져 실족하지!" 않는다.

- 그렇다면 "오늘날 세상이 교회와 기독교인을 조롱함은, 모두가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함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믿음과 사명의 자리를 주셨는지, 이를 잘 지키며 살아가는지!" 자문해보자!

-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 주신 믿음의 자리를 잘 지켜서, 불신을 이겨내고 믿음으로 승리하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