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묵상(14) -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심을 알아가려면.

다솔다윤아빠 2024. 8. 16. 04:43

@ 출애굽기 묵상(14-231210)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심을 알아가려면(6:2~9).

 

주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묻자, 제자들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이다!" 불행히도 "당시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고, 왜 이 땅에 왔고, 무엇을 하는지!' " 몰랐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공생애 때와 구약 시대, 심지어 오늘도 많은 이가 믿는다면서, 하나님을 잘 모른 채" 살아갑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지식은 소유적 지식과 존재적 지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특히 "머리로 아는 지식과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은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존재적, 체험적 지식보다 소유적 지식, 머리로만 아는 지식을 진짜로 착각해서, 신앙생활보다 종교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면 매사에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자, 존재적 체험적 지식을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여기서 지식은 '야다!' 존재적, 체험적인 지식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이왕 신앙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에 관하여 체험적 존재적 앎을 가져야 하지!" 않겠어요? 또한 "나의 앎이 소유적 지식인지 체험적 지식인지, 항상 확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3&7절에서 "'알리지 아니하였고, 알지라.' 원어 '야다'란 단어가 반복되어" 나옵니다. 여기서 "'야다'는 소유적 지식이 아닌 존재적 체험적 지식을" 뜻합니다. 이는 "당시 선민이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서 익숙하게 알았지만, 체험적 존재적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에, 바로의 억압과 폭정에, 너무 쉽게, 속히 무너졌던 것"입니다.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더 깊이 알아가면, 분쟁과 다툼, 시험과 상처, 이단의 공격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나부터 "하나님을 체험적 존재적으로 알아간다면, 내 삶과 가정, 교회와 미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한 해를 마무리하며, 주께서 이 땅에 오심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입니다. 세상은 "흥청망청 떠들썩하지만, 나부터 주의 오심을 신실하게 기다리며, 체험적 존재적 앎으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져야 할 때"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 우리가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알아가려면, 항상 1인칭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마음이 상하고, 노역으로 고되고 힘든 선민에게, 계속 1인칭 주어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으니, 나의 이름을 알리지 않고, 나의 언약을, 내가 너희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리라." 당시 "하나님은 천사와 사역자를 사용하셔서, 충분히 출애굽을 인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하는 선민에게 2~3인칭이 아니라 1인칭으로 직접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선민이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기를" 원했습니다. 14: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을 통해 2~3인칭이 아닌 1인칭으로 직접 내게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1인칭으로 다가오시는데, 우리는 '너의 하나님, 목사의 하나님, 가족의 하나님' 2~3인칭으로 믿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게 "나부터 1인칭 신앙이 아닌 2~3인칭 신앙, 하나님에 관해 간접적 앎으로 살아가기에, 많은 문제에 함몰되어" 넘어집니다. 체험적 "앎이 아니기에, 상처와 시험, 불평과 원망으로 믿음이 쉽게 자주" 흔들립니다. 체험적 "앎이 아니기에, 예배드려도 은혜와 감사보다 내 고집, 거슬리는 것이 더 많고, 심지어 열심히 봉사하면 할수록 더욱 힘들어"집니다. 그렇게 "믿음이 약해지면서, 마침내 십자가 보혈로 주신 고귀한 구원마저 잃고" 맙니다.

 

물론 "매사에 '내가, 나부터, 나는' 1인칭 신앙이 힘들고 어려움을 잘" 압니다. 그러나 "1인칭 신앙은 더 깊은 말씀, 간절한 기도, 신실한 봉사와 헌신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나와 내 자녀, 교회를 바꾸는 힘이" 됩니다. 6·25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이 대대장에게 현장 보고를" 받았습니다. "모두가 굶고 지쳐 있고, 물도 없어서 더는 버틸 수 없습니다." 그러자 "백선엽 장군은 대대장과 휘하 군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잘 싸웠는데, 여기서 물러서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워서 후퇴하면, 뒤에서 나를 쏴라!" 그리고 "백 장군이 앞으로 달려나가자, 모두가 '이제 우리가 앞장서겠습니다.' 힘을" 냈습니다. 그렇게 "장군과 장병 모두 '내가, 나를, 우리가' 1인칭으로 나아갔을 때, 어렵고 힘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어렵고 힘들 때, '내가, 나부터!' 1인칭 신앙으로 봉사하는 헌신자가" 많습니다. 여기서 "'내가, 나부터' 이는 나를 나타내는 자기 과시나 오지랖이 아니고, 오히려, 자원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솔선수범을" 뜻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나부터, 내가' 보다 '젊은 세대가, 중직자가, 목회자가!' 2~3인칭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충분히 할 수 있고, 꼭 해야 함을 알지만, 변명과 핑계로 여전히 2~3인칭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길 원한다면서, 어떻게 방관과 주저함으로 2~3인칭 신앙에 안주할 수" 있겠어요? 지금 "내 자녀와 배우자가 큰 위기에 처했는데, 나부터 나서지 않고, 어떻게 누군가의 도움만" 기다리겠어요? 오늘 "우리는 계산함과 두려움, 시험, 상처, 낙담, 불만으로 1인칭 신앙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1인칭 신앙의 회복은 타인의 도움보다, 내가 직접 다시 하나님과 말씀을 붙들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아합이 "아람과 전쟁 전, 하나님께 '어떻게 누가 전쟁에 앞장설지' 묻자, 하나님은 왕상 20:14절에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고관과 그 자녀들도 도와야 했지만, 아합 본인부터 1인칭 신앙으로 싸움에 나서야!" 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나부터' 먼저, 1인칭 신앙으로 살아가야, 하나님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말씀합니다.

 

17:3절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서 영생을 얻게 하심에" 있습니다. 이처럼 "죄인인 인간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적 존재적으로 앎은 생사가 걸린 너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인데, 우리 각자가 항상 1인칭 신앙으로 무장되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기" 원합니다.

 

2. 하나님을 내 하나님을 알아가려면, 우리 마음이 판단의 기준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9절은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말씀합니다. 당시 "선민은 1인칭 신앙이 없고, 게다가 가혹한 노역으로 마음이 상해서 철저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마음의 상함''근심하다. 낙심하다. 조급해지다.' 의미로, 인간의 감정 변화를" 강조합니다. 얼마 전 "선민은 출애굽 소식을 듣고서, 기쁨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이 버거워지자, 감정과 마음이 변해서, 하나님에 관한 앎이 점점" 흐려졌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상한 감정이 10가지 재앙을 겪으며 회복되었다가, 홍해 사건으로 또 낙담하고, 그렇게 계속 감정과 마음이" 변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눈앞의 현실이 달라질수록, 감정과 마음이 자주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엄마가 "어린 아들에게 '너 나중에 장가가서 네 아내가 나를 힘들게 하면 어떻게 할래?'"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당당하게 '당연히 쫓아내야죠!'" 답했습니다. 20년 후 "엄마가 같은 질문을 하자, 아들이 '내가 무슨 힘이 있나! 그냥 아내와 같이 나가야죠!'" 답했답니다. 이처럼 "우리 삶은 절대로 고정적이지 않고, 항상 변화무쌍하게 바뀌고 변해"갑니다. 문제는 "이처럼 우리 삶이 계속 바뀌지만, 사람마다 이에 흔들리는 정도가 제각각" 다릅니다. 혹자는 "상황에 따라 감정이 쉽게 바뀌지만, 혹자는 감정보다 믿음으로 삶의 굴곡을" 이겨냅니다.

 

세상 "누구도 계속 변덕을 부려서 낭패 보고, 팔랑귀가 되어 가볍다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감정과 상황이 이처럼 가변적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온전하게 알아가려면, 불변하는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2~8절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민을 위로하는 애정과 사랑, 은혜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당시 선민은 심한 노역으로, 마음이 너무 상해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거부했기에, 말씀이 바른 판단 기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선민이 마음이 상할수록, 말씀을 깊이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문제는 "오늘 우리도, 말씀을 소유적 앎으로만 알아서 실족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말씀이 삶의 판단 기준이 아니기에, 믿는다면서, 오히려 현실은 더 힘들어지고" 맙니다.

 

바라기는 "어려움과 아픔이 있을 때, 내 음성, 세속적인 사람들의 음성보다 하나님 말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길" 원합니다. 존 번연이 "국왕의 명을 어기고 투옥되었는데, 옥졸이 힘들어하는 번연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오늘은 집에 가서 쉬고 오세요!" 그렇게 "옥문을 열어주었는데, 얼마 후 돌아온 번연을 보고, 옥졸이 이유를 묻자, 번연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고맙지만, 성령께서 가지 말라고 해서 돌아왔어요!"

 

공교롭게도 "그날 밤, 번연을 투옥한 국왕이 감옥을 찾았지만, 모두가 무사한 후, 옥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성령의 음성에 따라 행동했기에, 당신과 내가 살았어요!" 물론 "우리가 성령의 음성대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말씀이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안 삼고는 생사의 문제"입니다. 부족해도 "우리가 말씀을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감이 내 인생과 자녀, 가족과 교회를 더욱 풍성하게 바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누구보다 바로 나부터 매사에,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말씀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매년 "1031일은 할로윈과 종교개혁일이 겹쳐서, 그 영적 전쟁이 가장 치열한 시기"입니다.

 

이처럼 "대림절은 연말이기에, 세상의 흥청망청함과 예수의 오심을 기다림이 영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부터, 우리 교회부터, 하나님 말씀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면, 대림절에 누릴 은혜가 달라질 것"입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