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묵상(20) - 선민을 인도하시는 방법.

다솔다윤아빠 2024. 8. 24. 02:11

@ 금요기도회 출애굽기 묵상(20~240405) - 선민을 인도하시는 방법(13:17~22).

 

1959"제작된 벤허는, 아카데미 11개 부분 수상작으로, 마차 경주 장면이 최고 압권"입니다. 벤허는 "예수와 동시대인으로, 유대 귀족에서 반역자, 노예, 로마 장군의 양자로 신분이 바뀌며, 참으로 극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특이하게도 "영화에서 예수도 등장하는데, 뒷모습만 나올 뿐 그 얼굴이 한 번도 안 나오지만, 벤허의 인생 고비마다 찾아와서 그 삶을 인도"합니다. 훗날 "벤허는 자신의 삶을 선하게 인도한 분이 예수임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선하고 옳은 길을 간다고 믿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옳은 줄 알았던 길이 틀렸고, 가지 말아야 하고, 가면 안 되는 길을 가기도 하고, 심지어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처럼 인간이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우리 삶에 선하고 신실한 인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내가 누구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출애굽은 "선민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계획하고 인도하신 구원의 여정"입니다. 따라서 "출애굽은 그 시작과 과정, 결과까지, 모두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본문 17절에서 "하나님은 선민이 전쟁을 만나면 두려워서 애굽으로 돌아갈까 봐, 먼 길로 인도"하십니다. 당시 "하나님의 인도함은 단지 선민의 길잡이 역할만 감당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과정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어떠한지, 이미 거주하던 이방인의 상황까지 살피시며, 선민을 인도"하셨습니다. 당시 "선민은 잘 몰랐지만, 선민을 가장 선하게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수고와 일하심이 참으로" 컸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한결같은 하나님이, 출애굽 선민은 물론, 오늘 우리까지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감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모르기에, 내 뜻과 다르다고 원망하고 실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가장 완벽하고 온전함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영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지만, 어리석은 영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마치 양처럼 각기 제 갈 길로 가며 방황"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선하게 인도하셨는데, 지금도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는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선민보다 앞서가시며 인도하셨습니다.

 

본문 21절은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말씀합니다. 여기서 "'앞에서 가시며' 원어는 '하나님께서 선민 앞에서 계속 인도하여 걸었다.'라는 뜻"입니다. 문법적으로도 "한 번만 앞서가심이 아니라, 계속 선민보다 앞서가셨음을" 강조합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앞서가셨기에, 선민은 그저 하나님의 뒤를 그대로 따라가야!" 했습니다.

 

근동의 "광야는 물이 없고, 풀 한 포기조차 자라기 힘든 척박한 땅"입니다. 게다가 "선민이 애굽에서 430년을 살았기에,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이 많이 생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척박하고 생소한 땅을 앞서가서 길을" 여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누구도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안전한지 위험한지, 밝은지 어두운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삶의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는 주저하고 두려워하며, 많은 기회를 놓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 믿을 만한 분이 앞서간다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특히 "내가 잘 모르는 길, 생소한 초행길에서, 전문가가 앞서서 가면 얼마나" 복될까요? 무엇보다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보다 앞서가신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힘이" 날까요? 그러나 "현실을 보면, 가장 든든한 하나님보다, 믿지 못할 세상과 인간을 따라갈 때가 더" 많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다수결을 믿고, 세상의 평판을 믿어서, 뒤쫓아" 갑니다.

 

1992"장신대 입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만 했는데, 나중에 신학교 입학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달았습니다. 당시 "재학생보다 더 많은 입시생이 도서관에서 공부했고, 입학자료가 정말" 많았습니다. 게다가 "많은 입학생의 부모가 큰 교회 목사와 장로여서, 주변에서 주는 도움이" 컸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정에서 목사와 장로 한 분도 없어서, 신학교를 입학할 때 앞장서서 인도해줄 분이 전혀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앞서가심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회고해 보면, 가장 정확한 시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시간과 방법, 사람을 통해서, 앞서가시며 길을" 여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앞서가심의 은혜를 믿고, 나부터 발을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 21절은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보호하면서, 앞으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침묵하지만, 만일 선민이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갔다면, 하나님께서 선민을, 일부러 앞으로 진행하도록 이끌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 "선민은 하나님의 앞서가는 인도함에 순종해서 전진했기에, 가나안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선민이 두렵고 힘들다고, 하나님의 앞서가심을 불신했다면, 전진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인간의 앞서감을 따라가면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할 수도 있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앞서가며 전진하라 하시면, 이는 나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진행하라. 앞으로 나아가라.' 말씀하시면, 순종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선민의 "여정을 보면, 출애굽 세대는 홍해를 건넜지만, 2세대는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당시 "홍해는 애굽 군의 공격으로 안 건널 수 없었고, 죽지 않으려면, 건너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은 추적자는 물론 전쟁도 없어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요단강이 멈출 것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선민은 하나님의 앞서가심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앞으로 내디뎠을 때, 요단강이 멈추고, 길이 열리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너무 생각이 많고, 수지타산을 계산하고, 하나님의 앞서가심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심지어 "내가 앞서가고, 하나님은 뒤따라 오며, 내 문제를 정리해 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앞서가심, 길을 열어주심, 선하신 인도함을 확신하고, 앞으로 나아감으로 항상 승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선민을 떠나지 않으시며 인도하셨습니다.

 

본문 22절은,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말씀합니다. 일교차가 "심한 중동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세밀하신 "하나님은 그렇게 무더운 낮과 추운 밤에도, 선민을 보호하고" 챙기셨습니다. 특별히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선민을 떠나지 않았다.' 이를 직역하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선민 앞에서 계속 떠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떠나지 않음은, 하나님께서 선민을 떠나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으로 두렵고 막막했던 선민과 계속 함께하며 보호"하셨습니다. 당시 "연약했던 선민이, 이방 민족에게 강하고 엄청난 무리로 보인 이유는, 그 숫자와 규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민을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하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선택하신 주의 백성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하시며 책임져" 주십니다.

 

연약한 "인간은 누군가 함께하다가 헤어지면, 그 외로움과 허전함이 커져서 많이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속담처럼, 떠남과 헤어짐은 참으로 힘든 주제"입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실례로, 많은 조부모가, 멀리 있던 손주가 오는 것이 기쁘고 반갑지만, 며칠이 지나면, 손주가 갈 때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멀리서 손자가 올 때보다, 갈 때, 감사헌금 액수가 더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제가 "수술 후, ICU에 있을 때, 아내가 잠깐 화장실을 다녀 왔는데, 제가 '어딜 갔었냐? 환자를 혼자 두고 어딜 다니냐?' 화를" 냈답니다. 물론 "저는 기억에 없지만, 누군가 옆에 없는 것이 너무도 두렵고 힘들었기 때문" 아닐까요? 미안하게도 "그 후, 아내가 저를 돌보느라고 화장실도 편히 못 가서 많이 힘들었다." 말했습니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아내라도 항상 나를 항상 떠나지 않고 함께해 주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임을" 절감합니다.

 

실제로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나의 연약함이 무엇이고, 나를 어떻게 도울지, " 모릅니다. 게다가 "인간이 나를 떠나지 않음은 힘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연약함을 가장 잘 아시고, 나를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고 지키시며, 나를 떠나지 않기에, 그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본문 22절은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말씀합니다.

 

구름 기둥은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보호하심이고, 불기둥은 밤의 한기로부터 보호하심"입니다. 당시 "하나님께서 선민을 기후로부터 보호하셨다면, 그 외의 모든 것도 다 보호하지!" 않았겠어요?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은 세세하고 사소한 일까지, 선민을" 챙기셨습니다. 그런데도 "선민은 한결같이 보호하며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몰랐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보호가 항상 나와 함께하기에, 나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지 않고 보호하지만, 나는 쉽게 하나님을" 떠납니다. 심지어 "중요한 문제도 아닌 사소한 문제, 작은 시험과 상처로,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떠난다면, 나와 하나님 중, 누구 손해가 더" 클까요? 하나님은 "부족함과 연약함을 다 알고도, 나를 떠나지 않고 보호하는데, 우리가 이를 잘" 모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그 상처와 아픔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을 것"입니다.

 

문제는 "가룟 유다도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지만, 주님은 유다를 떠나지 않으셨지만, 오히려 유다가 주님을" 떠났습니다. 반면에 "베드로의 위대함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다락방에 가서 함께 기도함에" 있습니다. 그렇게 "베드로가 주님을 떠나지 않고, 그 보호하심을 확신했을 때, 성령의 임재로 그 인생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길 원하시는데, 지금 나와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 친밀함은" 어떤가요? 우리 "삶에서, 나를 떠나지 않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과 더 깊이 동행하며,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