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묵상(21) - 이스라엘 자손이 바로를 이긴 이유.

다솔다윤아빠 2024. 8. 24. 02:11

@ 금요기도회 출애굽기 묵상(21~240412) - 이스라엘 자손이 바로를 이긴 이유(14:1~9). 비전

 

지난 "1967년에 있었던 이스라엘과 중동의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당시 "언론은 이스라엘의 승리 원인으로, '유일신 신앙, 국론통일, 제공권 장악' 세 가지를" 꼽았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전쟁 초기에, '가공할 만한 비밀 무기가 있다. 반드시 승리한다.'" 공언했습니다.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은 이스라엘이 언급했던 최첨단 무기를 찾았지만, 종전 후, 이스라엘이 밝힌 최신 무기는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모든 "국가와 인간은 어떤 전쟁이건 패함보다 승리를" 원합니다. 실제로 "영적 전쟁, 국가 간 전쟁, 인생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항상 이에 상응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삶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영적으로 항상 굳건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승리를 원하면서, 승리하려는 준비와 열정, 자세와 태도가 부족해서, 합력보다 분열, 포용보다 지적과 비판, 사랑보다 정죄가 더 많기에, 패함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선민은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로 살았기에, 애굽의 풍요로움과 강력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당시 "선민이 출애굽에 성공해서 홍해에 진 쳤지만, 그 모양이 마치 광야에 갇힌 것 같아서, 눈앞에 다가온 애굽 군은, 선민에게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바로는 본문 4절에서, 일부가 아닌 애굽의 온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 왔습니다. 본문 7절은 "당시 바로가 선발된 병거 600, 모든 병거를 다 동원했다." 말씀합니다.

 

비록 "선민이 모세의 명대로 담대하게 전진했지만, 그 두려움과 공포가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불리하고 열세로 보였던 선민이 하나님 은혜로 애굽을" 이겼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애굽 군대처럼 엄청난 삶의 압박에 직면하지만, 이를 이겨내며 오늘까지" 왔습니다. 실제로 "지난날, 절망하며 낙담할 때가 있었고, 포기할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6:3'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주의 백성이 패함보다 이기기 원하시고, 이기는 비결을 붙잡고 살아가라!" 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겼다고 말씀하시고, 이기기 원하시기에, 우리도 이기는 신앙으로 무장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애굽과 전쟁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하려면, 어떤 삶의 자세로 무엇을 꼭 기억해야 할지!"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에 이겼습니다.

 

하나님은 "본문 2절에서, '이스라엘에게 비하히롯 맞은 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 명하십니다. 전쟁에서 "바닷가에 진을 침, 배수의 진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뜻합니다. 그러나 "당시 연약한 노예에 불과했던 선민은, 가능하면 애굽과 멀어져야 했고, 가급적이면 다시 만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당시 선민은 도저히 애굽을 이길 수 없었고, 두렵고 무서웠지만, 하나님 말씀을 믿고 배수의 진을 치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이는 "연약했던 선민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잡았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만일 선민이 두려움과 공포로 '항복하자!' 여론을 조성하고, 의견이 분열되어 나뉘고, 모세를 거부하고, 말씀에 불순종했다면" 어땠을까요? 승리는 "절대로 인력, 인간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받게 되는 영적인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신실하게 일하심으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게" 이끄십니다.

 

우리는 "삶에서 겪는 모든 전쟁에서 어떻게 하면 이길지,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승리를 원하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내가 꼭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세상 방식대로 해 보고, 고집과 고정관념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기도" 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 맡기면 이길 수 있는 데, 적기를 놓쳐서 나중에 후회하며" 아파합니다. 밧단아람에서 "귀향한 야곱이 세겜에 정착했지만, 외동딸인 디나가 치욕적인 일을" 당했습니다.

 

분노한 "시므온과 레위가, 할례로 아파하는 세겜 남성을 몰살하며 잔인하게 복수"했습니다. 하나님은 "세겜의 모든 전후 사정을 듣고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나를 처음 만났던 벧엘로 올라가라, 이방 신상과 장식품을 버려라, 의복을 바꾸어라!" 상식적으로 "세겜의 공격이 눈앞에 있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한다면, 어쩌면 몰살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두려웠지만, 용병을 사지 않고 무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의지하여, 벧엘로 올라갔고, 이방 신상과 장식품을 버리고 의복을 바꾸어서, 세겜에 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께 온전히 맡김이 신앙이고, 신앙에는 항상 하나님 주시는 승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온전히 맡겨야 함을 알면서도, 현실은 이해되는 정도만, 일부만 맡기며" 살아갑니다. 승리를 "원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의지해서, 우리의 신앙은 항상 어정쩡함, 대충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의 어정쩡한 신앙,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을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핵심은 "분명하고 온전한 신앙은 승리하지만, 어정쩡하고 대충인 신앙은 패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살아갑니다. 혹자가 "우리가 무엇을 알 때, 분명히 아는 것과 희미하게 아는 것을 이렇게 비교하며" 말했습니다.

 

"분명히 아는 것과 희미하게 아는 것은 전혀 다르다. 분명히 앎은 내 것이지만 희미하게 앎은 남의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믿음과 희미하게 믿음은 다르다. 분명히 믿으면 신뢰받지만, 희미하게 믿으면 의심받기 때문이다. 분명히 사랑함과 희미하게 사랑함은 다르다. 분명히 사랑하면 아름답지만, 희미하게 사랑하면 추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떠남과 희미하게 떠남은 다르다. 분명히 떠남은 새로운 것을 얻지만, 희미하게 떠남은 과거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맡김과 희미하게 맡김은 완전히" 다릅니다. 인간관계에서 "온전한 신뢰와 희미한 신뢰의 깊이와 그 영향력이 어떻게" 같겠어요?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 함을 알면서도,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다시 내 신앙을 되돌아보며, 온전하게 맡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하게 맡길 때, 모든 것을 책임지고, 승리를 주실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온전하게 맡기는 주의 백성에게 백전백승을 주실 유일한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부터라도,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 내 삶과 미래, 선택과 결정, 아픔과 눈물, 기쁨과 감사,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선민이 애굽을 온전히 이겨냈던 것처럼, 우리도 모든 영적 전쟁에서 항상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2. 바로는 내려놓아야 할 것에 미련을 가졌기에 졌습니다.

 

본문 5절은,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말씀합니다. 이는 "10가지 재앙으로 장자까지 잃었던 바로와 애굽 신하들이 후회와 한탄에 빠져 고백한 내용"입니다. 그렇게 "당하고 혼났지만, 다시 선민을 붙잡겠다는 깊은 미련이 오판을 일으켜서, 애굽의 모든 정예 군대를 이끌고 선민을 추격"했습니다. 당시 "바로와 애굽 군은 선민이 친 배수의 진을 보고서, 어쩌면 더더욱 의기양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리석은 미련에 빠졌기에, 참담하게 전멸당했던 것"입니다. 누구도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 없고, 시간을 더 빨리 가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에 "우리는 과거의 것이 아무리 좋았어도, 과거의 미련에 빠져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과거의 미련에 빠져서, 불행히도, 과거에 파묻혀" 살아갑니다.

 

혹자는 "일류 대학 졸업을 자랑스러워하지만, 그 자존심이 삶의 장애가 되어 나를 더 얽매고 제한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인데, 과거가 지금의 삶을 지배하게 함이 문제"입니다. 아브람은 "가축이 많아서 조카와 갈등이 발생하자, 삶의 정착지 선택권을 롯에게 양보"했습니다. 롯은 "그렇게 먼저 정착지를 살피면서, 풍요롭게 보였던 소돔을 택했지만, 불행히도, 소돔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악이 관영한 땅"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소돔을 심판하실 때,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롯의 가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의 처는 소돔을 되돌아봐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롯의 "처는 미래보다, 과거 소돔에서 누린 풍요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지혜는 "과거에 대한 감사를 깊이 간직하고, 과거의 교훈으로 주어진 현재와 미래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는 안 바꾸고, 옛날만 찾고 있는데, 어떻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겠어요?

 

무엇보다 "우리가 과거에 대한 미련을 이기려면, 항상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을 먼저 행해야!" 합니다. 실제로 "과거에 붙잡힌 삶과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 중, 무엇이 더 큰 능력이" 있을까요? 과거에 "대한 미련은 인간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하나님 기뻐하는 지혜로운 삶은 현재와 미래를 바꾸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빠져 있기보다, 오히려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 지금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붙잡고 헌신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18세기 초 "윌리엄 윌버포스는 노예무역을 반대하여,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너는 영국의 경제를 망치려고 한다. 노예무역을 폐지하면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 너는 영국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에 "윌버포스는 국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영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노예무역을 반대한다. 노예무역이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주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반대하는 악을 행하는 나라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윌버포스는 '하나님께서 노예무역을 기뻐하지 않는다!' 싸우면서, 마침내 영국에서 노예무역을 폐지"했습니다. 놀랍게도, "노예무역 폐지 후, 영국은 더 크게 성장하고 발전"했습니다. 만약 "윌버포스가 동시대인처럼, 노예무역이 주는 이익, 미련에 연연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가 "하나님 기뻐하는 미래로 나아가려면, 과거의 미련을 회개하며 청산해야!" 합니다. 과거에 "대한 회개 없이, 하나님 기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과거에 대한 미련을 온전히 버릴수록, 하나님 기뻐하는 은혜가 더 커질 것"입니다. 대하 20:15절은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교회와 "기독교인이 영적인 전쟁에서 승패는, 전쟁에 대한 인식과 성격을 바로 이해함에서 결정될 것"입니다. 모두가 "과거의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 기뻐하는 것을 항상 먼저 택하여,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