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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묵상(01) - 왜 니느웨일까? 왜 요나일까?

다솔다윤아빠 2024. 8. 15. 04:28

@ 요나서 묵상(01-220731) 왜 니느웨일까? 왜 요나일까? (요나서 1:1~3).

 

토머스 "에디슨은 기계 외에도 심령 세계, 초능력 세계에 관한 관심이 참으로" 컸습니다. 그래서 "에디슨은 죽은 자와 교신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에디슨은 평생 1,093개의 발명품과 아이디어 노트 3,400권을" 남겼습니다. 특히 "백열전구에 맞는 필라멘트를 얻고자 6,000여 종의 식물을 실험할 정도"였습니다. 에디슨의 "위대함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묻고 또 물으면서 답을 찾아감에" 있었습니다.

 

게리 도빈스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은 올바른 질문에서 시작된다!"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악과 불합리에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개인적 "이익과 생계를 위해서는 계속 묻고 배우지만, 영생을 위해서 묻고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묻지 않음이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영적 미숙과 무관심 때문"입니다. 또한 "묻긴 묻는데, 쓸데없는 호기심, 시빗거리를 위해 물을 때가 더" 많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묻지 않으면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전락하여, 성장보다 제자리걸음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선민을 넘어 이방을 구원하려는 선교 지향적인 선지서"입니다. 특히 "요나서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이 북 왕국을 패망시킨 잔혹한 정복 국가인 앗수르의 니느웨까지 확대되었다.'" 말씀합니다.

 

나훔은 "니느웨를 '피 묻은 도시'로 불렀기에, 130년 후, 요나가 니느웨를 거부함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본문에서 "선지자로 소명 받은 요나가, 말씀에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나중에 "요나는 니느웨가 말씀을 듣고 회개했지만, 이를 기뻐하기보다 원망하는 이율배반적 모습이" 컸습니다. 당분간 "요나를 묵상하려는데, 제 마음에 든 중요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많은 도시, 많은 선지자 중에서 니느웨와 요나를 택하셨을까?"

 

우리는 "단지 주는 대로 받아먹는 소극적 신앙으로는, 지금의 팬더믹과 전쟁, 고물가 시대를 이겨낼 수 없음을 잘" 압니다. 물론 "매사에 ', 무엇 때문에, 어떻게, 무슨 목적인지' 묻고 답을 찾는 과정이 번거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도 "묻고 또 물을수록 내 신앙은 깊어지고 성장하고, 새로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은 왜 유독 니느웨와 요나를 택했는지 묻고, 그 답을 찾으며 한 주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택하심은, 우리가 항상 살리고 세우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니느웨는 선민과 요나 모두에게 국가적 원수였기에, 구원보다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3:3절은, 니느웨를 사흘 길이 걸리는 성읍, 최상급까지 사용해서 지극히 크고 거대한 도시였다." 말씀합니다. 실제로 "당시 니느웨 인구가 60만이나 되었고, 그중 좌우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영혼이 무려 12만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절은,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말씀합니다.

 

당시 "선민과 많은 이방 국가는 니느웨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도움을 구할 정도로 그 악행이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토록 악했던 니느웨를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살리고 구하려고 요나를" 보내셨습니다. 인간과 "다르게!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목표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세워감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뜻과 다르다고, 화평과 분위기를 깬다고, 이상하다고, 다양한 이유로 살리고 세우는 일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 친한 사람의 생명은 귀하지만, 나와 반대편이면, 너무도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리려고 하는데, 내 생각과 편견, 이기심으로 죽이려 할 때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가득한 도시 니느웨에 요나를 보내서, 그래도 살리고 세워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살리고 구원하려고,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죽음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와 부활 복음으로 내가 살았다면, 나도 세상과 타인을 살리고 세울 방법을 항상 묻고 찾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공생애 때 "주님의 별명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는데, 여기에 참으로 큰 역설이" 있습니다. 당시 "선민에게 세리와 창기는 죄인이고, 구원이 아닌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세리와 창기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고, 긍휼히 여기지 않았지만, 주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불려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주님은 "천대받던 세리와 창기, 죄인까지도 살리고 세우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리와 창기의 악행보다, 그들의 부족함과 연약함보다, 그들을 살리고 세워야 할 하나님 백성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저는 "동성애를 반대하지만, 동성애자도 살리고 구원해야 한다는 도전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동성애는 "성경의 교훈과 다르기에 분명한 악이요 죄이지만, 우리는 죄와 악보다 그 영혼의 가치를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동성애를 강하게 거부해서, 하나님 형상을 지닌 인간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기보다, 미워하고 정죄로 실족하게 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문제는 "동성애가 분명히 죄악이지만, 말씀을 거부하고 내 생각대로 죄인을 미워하고 정죄하는 것도 악한 죄가" 아닐까요? 생각할수록 "나부터 죄인으로 심판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고 세우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면, 나도 죄와 악함보다 한 영혼의 소중함을 먼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 몫이고, 말씀에 순종하여 살리고 세우는 일은 우리 몫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1956"짐 엘리엇과 네 청년이 에콰도르에 도착하자마자,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비극이 있고 1년 후, 짐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다시 에콰도르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여성은 죽이지 않는 원주민 전통으로 사역이 이어졌고, 엘리자베스는 5년이 지나고, 자신이 살해된 선교사의 아내임을 밝히자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또한 "다섯 선교사를 죽일 때 동참했던 청년 키모가 아우카 족 최초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도 "사람이기에 아우카 족이 너무도 밉고, 원망과 상처가 컸겠지만, 그래도! 말씀에 순종해서, 남편을 죽였던 그들을 세우고" 살렸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 수많은 아픔과 원망, 미움과 다툼, 갈등이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니느웨를 살리고 세우려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묻고 찾아서, 순종하며 살아가라!'" 도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곳에 저와 우리를 형제자매로 묶어주시고, 한 교회를 섬기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핵심은 "니느웨처럼 악과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넘어지고 실족한 영혼,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세워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악할수록, 정죄와 무관심보다 살리고 세우는 방법을 물어서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주시는 답에 순종해서, 나부터 주변 가까운 영혼부터 살리고 세우며 승리하기" 원합니다.

 

2. 하나님께서 요나를 택하심은, 내가 선교적 사람으로 바뀌도록 도전을 주시려 함에 있습니다.

 

당시 "요나는 니느웨에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에, 도저히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니느웨가 선민에게 행한 악행이 너무도 크고 심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듣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즉시 니느웨와 반대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어리석게도 "요나는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을 피해 도망갈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 말씀보다 '니느웨는 반드시 망해야 해!' 자기 생각과 고집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심지어 "요나는 생각만이 아니라, 실제로 다시스행 배에 올라 행동으로도 불순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버리지 않고 바꾸셔서, 큰 은혜와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대한 성읍 니느웨는 물론, 요나부터 바뀌어서, 명목상 선교사가 아니라, 복음에 순종하여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선교적 사람이 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이 악하다. 문제가 심각하다. 변해야 한다.'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습니다.

 

혹자는 "교회에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매사에 "교회와 기독교인의 문제를 잘 지적하지만, 정작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나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를 끊임없이 물어서, 나부터 바꿔가야!" 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은행에서 송금하는데, 계좌번호가 너무 길어서 직원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296/496/8296/7296 너무 긴데, 계좌번호는 네 개 숫자인데, 이상해요!"

 

그러자 "할머니가 무슨 말이야! 나는 숫자 네 개를 불렀는데, 2구유 4구유 8이구유 7이구유" 답했데요! 정말 "묻고 또 물어서 바꾸어야 할 대상은 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요? 행전 9:18절은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말씀합니다. 성경은 "사울이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모습이 살기등등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살기등등 "원어는 추수를 앞둔 밭에 들짐승이 들어가서 엉망으로 만드는 모습을" 뜻합니다.

 

당시 "사울이 얼마나 악랄한 박해자였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그랬던 사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고 눈에서 비늘이" 벗겨집니다. 이렇게 "사울이 먼저 변화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이방인을 살리고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변화와 거듭남을 강조하지만, 남을 바꾸기 위해 묻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부터 내가 어떻게 말씀에 합하게 바꾸어야 할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내 배우자와 자녀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둘째가 "한국에 간 후, 교회 친구와는 자주 연락하면서, 제게는 딱 한 번 전화"했습니다. 제가 "서운해서, '왜 아빠한테 전화 안 해?' 묻자, 아이가 '아빠가 먼저 해요!'" 말했습니다. 현실이 "이러한데, 내가 세상과 교회, 내가 속한 공동체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핵심은 "외부와 주변이 아니라, 바로 나부터, 나를 어떻게 무엇으로 바꾸어야 할지, 그 방법을 묻고 또 물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유는 "내가 먼저 바뀌어야 내 미래, 가정과 자녀, 교회와 세상, 인간관계마저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남성이 20대가 되어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돌을 들었지만,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성이 "30대가 되어서 아내를 바꾸겠다고 눈꼬리를 치켜들었지만, 오히려 아내와 관계만 깨지고" 말았습니다.

 

남성이 "40대가 되어, 아이들을 바꾸겠다고 매를 들었지만, 아이들의 반항만 더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50대가 "되어서 정말 바꾸어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깊이 깨닫고, 자기를 바꾸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혹시 "60, 70, 8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주변을 바꾸겠다고 힘쓰며 아파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은 큰 꿈을 꾸고, 대단한 일이 있어야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가정을 원한다면, 나부터 좋은 남편과 아내, 좋은 부모와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직장을 원한다면, 나부터 좋은 직원과 상사가 되어야 하고, 좋은 교회를 다니고 싶다면, 나부터 말씀에 합한 좋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에 "우리는 바로 오늘 여기서부터, 나부터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항상 물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나부터 먼저 바꾸어 가며, 말씀에 합한 선교적 삶으로 재정립해 가며 날마다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