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요나서

요나서 묵상(02) - 요나를 물론 나도, 모두가 빠지는 함정.

다솔다윤아빠 2024. 8. 15. 04:29

@ 요나서 묵상(02-220807) 요나는 물론 나도, 모두가 빠지는 함정(요나서 1:1~3).

 

어떤 "목사 부부가 심방을 마치고 귀가했는데, 사모가 '교인 집에 안경을 두고 와서 다시 찾아와야 한다.'" 말했습니다. 이에 "목사가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 잔소리 중, 교인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목사가 사모에게 '안경 가지고 올 때, 내 핸드폰도 좀 챙겨서 가져와요!' 조용히" 말했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싫어하지만, 그래도 실수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인생의 함정을 싫어하면서, 누구나 함정에 빠지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정도와 깊이의 차이가 다를 뿐, 원하지 않는 다양한 함정에 빠져서 힘들어" 합니다. 국어사전은 "함정을 짐승을 잡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 누군가를 어려움에 빠뜨리려는 계략으로 정의"합니다. 또한 "함정은 내 고집과 고정관념이 될 수도 있고, 갑자기 나를 힘들게 하는 삶의 고난과 어려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갑자기 찾아온 질병, 가족과 이별, 경제적인 어려움, 영적 시험과 상처, 삶의 함정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이처럼 "누구나 함정을 피할 수 없다면, 삶의 함정을 극복할 바른 방법을 말씀에서 찾아야, 그 삶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실례로 "혹자는 말씀으로 함정을 벗어나지만, 혹자는 계속 원망과 불평으로, 악순환의 함정에 빠져 허덕이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죄와 악함이 가득했던 니느웨에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선민을 괴롭힌 니느웨는 망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 생각의 함정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였지만 말씀에 불순종했고, 때마침 만난 다시스 행 배에 오르며, 어쩌면 '잘 됐어! 잘 풀리네!'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당시 다시스 행 배가 무난하게 출항하자,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요나는 자기 생각대로 되어서 좋다고 여겼지만, 사실 이런 순적함이 영적 함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요나가 자기중심적 생각의 함정에 빠진 결과, 본인과 주변 모두가 함께 깊은 함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모든 함정은 내 삶의 발목을 잡고,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고, 큰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당연히 "기독교인의 삶에도 다양한 함정이 있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과 말씀 붙잡고 삶의 다양한 함정을 극복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어떤 인생의 함정에 빠져 있고, 이를 어떻게 이겨내려고 노력"하세요? 본문을 통해 "요나와 나, 그리고 모두가 자주 빠지는 삶의 함정이 무엇인지, 이를 이겨낼 방법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우리는 하나님 주신 사명을 피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 3절은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여" 말씀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은 하나님의 임재와 감찰하심을 벗어나려고, 하나님의 영향력이 없는 곳으로 가겠다는 의도"였습니다. 또한 "도망하여! 이는 '매우 은밀하게 그리고 서둘러서 도망갔음'을 강조"합니다. 어리석게도 "요나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서도, 은밀하게 그리고 서둘러서 도망가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갈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는 '니느웨는 반드시 망해야 해!' 깊은 자기 고집의 함정에 빠져서, 사명마저 잃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요나는 하나님을 피할 수 있다는 착각과 영적 무지의 함정에 빠져서, 마침내 안 겪어도 되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사명은 "지금은 물론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고, 여전히 내 생명이 유지되는 원인"입니다. 생각할수록 "사명은 때때로 큰 부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사명이 나를 나 되게 지탱해 주는 힘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팬더믹과 전쟁으로, 사명을 망각하고, 낙담과 좌절의 함정에 빠져" 살아갑니다. 게다가 "점점 더 다양한 변명과 핑계의 함정에 빠져, 아예 하나님 주신 사명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심지어 "마귀의 미혹으로 사명은 안 지켜도 되고, 피할 수 있고, 피해도 되는 것, 목사와 중직자의 몫으로 착각"합니다. 혹자는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예수를 믿든 안 믿든, 무조건 구원하신다는 성경과 무관한 함정에 빠져 살아가기도" 합니다.

 

마침내 "어떤 함정에 빠진 것인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 왜 살아가야 할지, 삶의 방향마저 잃고 방황"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승리하려면, 다양한 인생의 함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나를 미혹하여 힘들게 하는 함정에서 더는 도망가지 말고, 다시 말씀 붙잡고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명을 다시 찾으려고 노력하는 영혼을 힘있게 붙드시고, 함정을 이겨내도록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자신이 받은 사명을 다 망각하고, 깊은 무기력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40년간 잃어버린 사명을 다시 찾게 하시려고,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이고, 아브라함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하나님 이름을 알려주고, 손에 든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고, 손에 문둥병이 발하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나는 입이 둔해요. 보낼 자를 보내세요. 못해요!' 여전히 무기력의 함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말씀대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도망가지 않기로 결단하면서, 무기력의 함정을 벗어나 사명을 되찾았고, 마침내 출애굽을 주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전히 사명을 잃고 함정에 빠져 살아가는 이유는, 계속 변명과 핑계에 빠져서, 함정을 이기려는 결단과 각오보다, 계속 도망가고 회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못한다. 안된다!' 사명을 잃고 함정에 빠져서 해 보지도 않고, 쉽게 습관적으로 포기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문제는 "계속 그렇게 무기력과 변명, 포기의 함정에 빠져 사명과 멀어지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어쩌려고" 그러세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하는데, 힘들수록 하나님 말씀을 더 굳게 붙잡고, 도망보다 믿음으로 받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실제로 "아무리 큰 사명이라도, 도망가면 길이 막히지만, 믿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면, 새로운 길과 승리가 열릴 것"입니다. 어떤 "회사가 영업사원의 거래실적과 집념의 상관관계를 발표"했습니다.

 

물건을 "팔 때, 영업사원 48%는 한 번만 권했고, 25%는 두 번 권하고 포기했고, 12%만 네 번 이상을" 권했습니다. 놀랍게도 "12% 영업사원이 회사 매출의 80%를 차지했고, 88% 영업사원은 불과 20% 매출만 올렸다고" 합니다. 영업도 "이처럼 도망가지 않고, 끈질긴 집념으로 성공할 수 있다면, 우리 신앙과 영적 태도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명을 "잃어버림은 내 능력의 부족보다, 도망가고 회피하려는 나태함이 가장 큰 원인"입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부담과 짐이 아니라 영생으로 이끄시는 기회이자 축복"입니다. 승리하려면 "힘들다고 더는 도망가지 말고, 말씀 붙잡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받은 사명을 회복하여 무기력의 함정을 이겨내야!" 합니다. 한주도 "힘들수록 도망가지 말고 받은 사명을 찾아서, 나태와 무기력의 함정을 이겨내기" 원합니다.

 

2. 누구나 잠깐 눈앞의 형통함에 마음을 빼앗기는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은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마침! 아이므차는 어떤 행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요나가 하나님 얼굴을 피해서 욥바에 왔는데, 이어서 다시스 행 배를 만났고, 또 이어서 배가 순조롭게 출항"했습니다. 이에 "요나는 '역시 내가 잘 했어! 잘 풀리네!' 잠깐 눈앞의 형통함에 더욱 취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잠깐 눈앞의 형통함이 오히려 함정이었고, 요나가 영적으로 실족하게 된 원인이다." 말씀합니다. 희로애락은 "우리 삶에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이 교차 되어 발생함을 교훈"합니다. 세상 "누구도 항상 기쁨과 즐거움만 누릴 수 없고, 그렇다고 항상 분노와 슬픔만 이어질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모두에게 희로애락이 반복되는데, 어리석은 영혼은 희로애락 중 어떤 한 부분, 잠깐 있다가 지나칠 부분에만 집착하여" 살아갑니다.

 

매번 "전체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져 허덕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영혼은 잠깐 눈앞의 형통함보다, 전체, 더 멀리, 더 온전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아브라함 "부부는 가나안에 정착하고 1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녀가 없자, 깊은 조급함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라는 아브라함을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도록 강요하였고, 마침내 원하는 대로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아들을 얻어서 잠깐은 기뻤지만, 이것이 아브라함과 사라,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큰 함정이" 되었습니다. 함정이었기에 "사라와 하갈의 관계가 깨지고, 이스마엘이 쫓겨나게" 됩니다. 또한 "17:1절은,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말씀합니다. 함정에 "빠졌던 아브라함은 무려 13년 동안 하나님과 영적 교류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훗날 "아브라함은 눈앞의 형통함만 쫓던 함정을 이겨내고, 더 낫고 온전한 하나님 약속을 신뢰하며 이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깊은 수렁과 함정에 빠져 허덕이는 이유는, 더 멀리 더 온전한 것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 일희일비, 작은 일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삶을 계속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작고 "사소한 일이 생각대로 잘 되면 기뻐하고, 반대로 뜻대로 안 되면 실족하고, 불평과 원망으로 믿음까지 포기"합니다.

 

어쩌면 "매일 그렇게 눈앞의 일로 기쁨과 슬픔을 반복하며,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가 자주 일희일비하는 이유는, 영생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눈앞의 고난이 크지만, 내가 천국을 확신한다면, 어떻게" 흔들리겠어요? 기독교인은 "악한 세상에서 이 땅보다 영생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눈앞의 형통함과 어려움에 일희일비한다면, 누가 그런 삶을 구원받았다." 하겠어요?

 

비록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삶의 함정이 쉽게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이는 일시적이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1928"대공황 때, 텍사스 뉴런던에서 석유가 발견되어, 다른 지역과 달리 거리 곳곳에 새로운 자동차가 넘쳐나고, 은행 예금이" 늘었습니다. 이어서 "간절했던 신앙이 식어가며 교회 예배자가 점점" 줄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뉴런던의 한 초등학교에서 대형 폭발 사고가 발생해서, 무려 294명의 어린이가 사망"했습니다. 이로 인해 "뉴런던 가정 대부분에서 슬픈 통곡이 이어졌고, 다시 하나님을 찾으며 회개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눈앞의 형통함에 빠졌던 신앙이 다시 더 낫고 온전한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 생각지 않은 어려움과 형통함은 계속 반복하여 찾아오겠지만, 문제는 이것이 절대로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힘들수록, 잠깐이란 함정에 빠지기보다 영원하고 온전한 것을, 믿음으로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팬더믹과 "전쟁의 아픔이, 우리 삶을 버겁고 힘들게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수록, 눈앞의 형통함과 어려움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 약속하신 천국을 더 굳게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영생을 바라보며, 잠깐의 형통함과 어려움의 함정을 이겨내며, 날마다 승리하는 한주가 되시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