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묵상(17) - 모세와 바로의 차이점.

다솔다윤아빠 2024. 8. 21. 23:13

@ 금요기도회 출애굽기 묵상(17~240119) - 모세와 바로의 차이점(8:8~15)

 

미국에서 "이민 목회를 하던 목사가 십 년 만에, 한국에서 섬기던 교회를" 찾았습니다. 과거 "친했던 권사가 다가와서 반갑게 인사하며" 말했습니다. "어쩌면 10년 만인데, 옛날 모습 그대로시네요. 늙지 않는 비결이라도 있어요?" 목사가 "이 말에 기분이 좋았는데, 또 다른 권사가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미국 목회가 고달픈가 봐요. 어쩌면 이렇게 팍삭 늙었어요." 목사는 "기분이 상해서 '교회 한 바퀴 돌면서 팍삭 늙었군.'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똑같은 일에 대한 상반된 의견과 해석, 차이점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상반된 의견, 그 차이점을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는가에 따라서, 내 삶의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리석음은 발생한 차이점에서 부정적인 것만 기억하지만, 지혜는 긍정적인 것을 기억"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만나는 다양한 상황에서 왜 이런 차이점이 발생하고, 그 차이점이 무슨 의미를 주는지 바르게 분별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모세와 아론은 생명을 걸고, 바로를 찾아가서 10가지 재앙을 계속 선포"했습니다. 당시 "모세와 아론은 계속 엄청난 재앙을 선포했고, 바로는 일방적으로 계속 당하기만" 했습니다. 10가지 "재앙 모두, 그 양상과 방향성이 유사했는데, 모세는 항상 하나님 말씀으로 강하게 경고했고, 바로는 엄청난 재앙을 겪으면서도 계속 완악"했습니다. 이처럼 "모세와 바로는 삶의 자세, 재앙에 대한 반응, 세계관과 종교 등, 모든 것마다" 달랐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처럼 열 번이나, 모세와 바로의 차이점을 계속 반복하여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모세와 바로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깨닫고, 더 선하고 좋은 것, 더 유익하고 나은 것을 배우라는 메시지"입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똑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모든 일에는 크고 작건 차이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어리석은 영혼은 삶에서 자주 발생하는 차이점을 알아보지 못하고, 알아도 이를 통해 배우며 성장하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영혼은 항상 차이점이 무엇인지 금방 깨닫고, 더 나은 것을 배우며" 자라갑니다. 본문에서 "모세와 바로의 차이점이 과연 무엇인지, 우리가 그 둘의 차이점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살펴봅시다.

 

모세는 한결같았고, 바로는 변덕스러운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바로는 "개구리 재앙으로 애굽이 어려워지자, 본문 8절에서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니라.'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5절에서, 바로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자, 마음이 완악해져서 자신이 했던 말을" 바꿉니다. 그렇게 "바로는 상황과 감정에 따라서, 자신이 약속한 것을 변덕스럽고 쉽게, 그리고 자주" 바꾸었습니다. 반면에 "모세는 개구리 재앙 이후, 바로에게 열 번째까지 계속 재앙을 선포하며 경고"하였습니다.

 

비록 "바로가 변덕스러웠지만, 모세는 한결같이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바로와 모세의 태도 중, 무엇을 더 선호하고, 무엇에 더 힘있게 응답"했을까요?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상황과 처지, 기분과 감정에 따라서 한결같을 수도 있고, 변덕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누구도 평생 변덕스럽기만 하고, 평생 한결같은 삶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문제는 "변덕스러움과 한결같음의 폭이 절대로 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변덕스러운 사람과 한결같은 사람 중, 어떤 유형과 더욱 친밀해지고" 싶으세요? 무엇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변덕스러움보다 한결같을 때, 훨씬 더 큰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한결같은 신앙을 원하면서도, 현실은 계속 바뀌고 오락가락하는 신앙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문제는 "그렇게 변덕스러움이 당연시되면서, 하나님과 주변 모두에게 신뢰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또한 "변덕스러움은 그만큼 확신도 없고, 게다가 분명한 목표의식조차 없음을" 뜻합니다. 심지어 "변덕스러움, 자주 바뀜은 선한 방향보다 나쁘고 악하게 되는 사례가 훨씬 더" 많습니다. 최근 "한국의 신조어로 '개근 거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우등상은 못 타도, 성실함을 상징하는 개근상을 받으면 참으로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자녀가 개근하면, 성실함보다 오히려 집이 가난하다고 놀림을" 받습니다.

 

개근 거지는 "가난해서 외국 여행을 한 번도 다녀오지 못했다고 조롱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최근 한국은 자녀가 기죽을까 봐, 무리하게 집을 넓히고 차도 큰 것을" 탑니다. 과거에는 "성실하게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고 살아가면 괜찮았는데, 이제는 남들 때문에, 부담스러워도 계속 비교하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최근에 유행하는 '개근 거지'란 단어가 미래에는 과연 어떻게 바뀔지, 마음이 많이 불편"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계속 이기적으로, 깊은 경쟁과 비교의식에 빠져, 악하고 변덕스럽게 변해" 갑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본받아, 한결같은 삶으로, 세상의 변덕스러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13:8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 1:17절은,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말씀합니다. 이처럼 "영적인 성장은 변덕스러움이 줄고, 하나님을 닮아서 한결같음이 늘어가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신앙은 모세의 한결같음과 바로의 변덕스러움 중 무엇이 더" 많나요? 한결같은 "하나님께서 변덕스러운 우리 마음과 태도를 어떻게" 보실까요? 베드로는 "항상 나서기 좋아하고, 기분과 상황에 따른 변덕스러움이" 컸습니다. 입술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말하고, 얼마 후 사탄으로 책망"받았습니다. 또한 "'저를 명하사 물 위를 걷게 해 주세요!' 말하고, 금방 두려워서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요한도 "별명이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로 불릴 정도로 다혈질의 성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덕스럽고 변화무쌍했던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위대한 사도로" 세워졌나요? 핵심은 "그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큰 은혜를 받고서, 변덕스러움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한결같은 신앙으로 평생 수고하고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모세처럼 한결같은 신앙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한결같은 신앙은 절대로 인간적인 결단과 각오로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한결같음은 나부터 신실하게 예배와 기도, 봉사와 찬양의 자리를 지키면서, 변함없는 은혜를 받을 때,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세상은 "계속 변덕스럽게 바뀌지만, 우리 신앙은 모세처럼 한결같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날마다 영적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2. 모세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살았고, 바로는 하나님과 끊어져 있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본문 9절에서 "모세는 바로에게 언제 개구리를 나일강에만 있게 할지 알려달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2~13절은, 모세와 아론이 개구리가 없어지길 하나님께 기도했고, 기도한 그대로, 개구리가 애굽의 모든 집과 마당과 밭에서 나와서" 죽었습니다. 이는 "당시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었기에, 기도하고 응답받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바로는 하나님과 끊어져 있었기에, 시간이 갈수록 재앙이 더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부탁해서, 재앙이 멈추면, 또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만일 "바로가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연결되어 있었다면, 열 가지 재앙이 다 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의학에 "통즉불통 불통즉통, 기혈이 막히지 않고 통하면 안 아프고, 막히면 아프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몸도 혈액순환이 잘 되면 건강하지만, 막히면 힘들고" 아픕니다. 많은 "여성이 갱년기에 호르몬 변화, 혈액순환이 안 되어 많이 힘들어" 합니다.

 

인간관계도 "서로 깊이 연결되어 대화가 통하면 가까워지지만, 통하지 않으면 서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통즉불통 불통즉통은 우리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면, 은혜가 깊어지고, 매사가" 기쁩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영적으로 끊어지면, 매사가 어렵고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항상 깊이 연결되어야 하는데, 끊어져 있음이 더 많음에" 있습니다.

 

현실은 "하나님과 끊어져 있으면서, '나는 잘 믿어, 나는 의로워' 착각하며 살아가는 영혼도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자신을 철석같이 믿지만, 실제 삶은, 기도에 대한 응답 체험도 없고, 하나님과 점점 멀어진 채" 살아갑니다. 핵심은 "죄인인 인간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저명한 "신학자가 오늘날 미국 사회가 앓고 있는 모든 병폐 원인을 계약 파기(Broken Covenant)" 말했습니다.

 

오늘날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기에,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많은 "현대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주일을 온전히 성수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를 안식해야 수많은 생태학적 문제, 건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하나님과 성수 주일에 대한 계약을 파기하면서 Blue Monday란 말이" 생겼습니다. 실제로 "현대인은 주일을 세속적으로 탕진하고, 월요일을 몽롱하게 시작"합니다.

 

이에 "미국의 주요 대기업은 월요일에 중요한 회의를 잡지 않는데, 이유는 Blue Monday에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미국이 다시 과거 청교도 신앙을 회복해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준수한다면, 월요일에 더욱 힘있게 일할 수 있지!" 않겠어요? 내가 "인정하건 부인하건, 인간은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인간은 절대로 혼자 힘으로 바르고 선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내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어서 은혜받아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남 유다를 25년간 선하게 통치했는데, 대하 17:9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 여호사밧은 "그동안 하나님과 끊어졌던 선민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영적으로 다시 연결하려 노력"했습니다.

 

비록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끊어져 있었지만, 한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한 시대를 살렸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하나님과 연결됨보다 끊어짐이 더 많기에, 나부터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비록 "소수지만, 나부터 하나님과 연결된다면, 교회와 가정, 내 미래가 바뀔 것"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기에, 이제부터라도, 오늘처럼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모세처럼 하나님과 깊이 연결된 삶으로, 날마다 영적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