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책별 묵상/출애굽기

출애굽기 묵상(24) - 순종하면 받는 복.

다솔다윤아빠 2024. 8. 24. 02:14

@ 금요기도회 출애굽기 묵상(24~240509) - 순종하면 받는 복(14:26~31).

 

법원에서 "판사가 도둑에게 '금은방에서 왜 진주목걸이를 훔쳤나요?' 묻자, 도둑이" 답합니다. "진주목걸이가 걸려있는 곳 위에 '이 놀라운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지 마세요.' 글을 보고, 그 말대로 했을 뿐입니다." 우리 "삶에 다양한 순종이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미혹, 내 자아의 생각에 순종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부족해도 "신실한 순종 이후에, 은혜와 능력, 열매가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은 "순종을 순순히 따름으로 정의하는데, 순순히 따르려면, 따를 말씀을 잘 듣고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들은 말씀도 없이 자기 마음과 뜻대로 행동한다면, 이는 순종이" 아닙니다. 따라서 "순종은 철저하게 말씀을 들음에서 시작되기에, 하나님의 책임짐이 순종 안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은 말씀을 듣고서 순종보다 고집과 아집이 더" 많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순종하는 삶과 말씀을 별개로 나누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애굽기에서 "10가지 재앙과 홍해 사건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분명히 나타난 이적들"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놀라운 이적들이 일어날 때마다, 모세의 철저한 순종이" 있었습니다. 본문 26절에서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라.' 명하셨고, 본문 27절은, 모세는 이 명령을 듣고,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철저히 순종했다.'" 말씀합니다. 따라서 "당시 원한이 가득했던 애굽 군이 선민을 추격하여 받은 심판은 모세의 철저한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나아가서 "선민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처럼 걷고, 물 좌우가 벽이 된 이적도 모세의 순종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본문 30~31절은, 순종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선민을 애굽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애굽 군을 심판하셨고, 선민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모세를 믿었다.'" 말씀합니다. 순종은 "참으로 익숙한 단어지만, 어쩌면 가장 어렵고 힘든 단어로 그 양면성이" 큽니다. 순종은 "말보다 행동을 요구하고, 내 희생과 헌신, 손해 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순종에는 언제나 승리가 있고, 하나님 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 순종의 시작과 끝을 모두 책임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순종에 엄청난 능력과 복이 있지만, 순종의 능력과 복은 모두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홍해의 선민처럼 순종하면, 과연 어떤 복을 누리게" 될까요?

 

순종하면, 하나님이 일하심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 28절은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말씀합니다. 모세가 "말씀에 순종해서, 이미 갈라진 홍해 위로 손을 내밀자, 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거짓말처럼, 이미 홍해로 들어간 애굽의 병거와 기병 모두가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문 29절은, 심판받은 애굽 군대와 전혀 다른 선민의 모습이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선민은 "홍해 속까지 엄청난 기세로 추격하던 애굽 군을 보고,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광야에서 죽게 하냐,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었나, 애굽을 섬기겠다고 했잖아!' 불평이" 컸습니다. 그랬던 "선민은, 모세의 온전한 순종으로, 모든 불평과 원망이 찬양과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세의 "순종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3:8절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과거 모세의 순종에 일하심을 보이셨듯,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불변하시는데, 말씀 앞에서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 아닐까요? 이민자의 "삶이 많이 각박하고 어려워서, 모든 교회와 가정마다 힘들고 버겁다고 하소연이" 깊습니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안타깝게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제일 먼저 줄어들고" 있습니다.

 

순종이 "줄어드니 하나님의 일하심을 놓치고, 신앙과 삶이 더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순종은 "믿음이자 모험인데, 믿음이 있어야 순종하고, 순종의 모험이 내 삶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1885"부활절에 언더우드가 제물포항,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당시 "언더우드는 한국에 올 계획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로 한국에" 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오며, 언더우드는 순종의 결단으로 소중한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이곳 조선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저희를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그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조선의 마음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역사에서 "'만일'이란 말이 없듯, 만일 언더우드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한국 기독교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요? 만일 "언더우드의 순종이 없었다면, 그를 통해 맺어질 소중한 열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엘리야가 두렵다고 갈멜산 영적 전쟁을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주신 잔을 거부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수많은 "기독교인과 성경 속 영적 거장의 공통점은, 그래서 순종함보다 그런데도 순종함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순종했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깊이 체험하며,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래서 순종은 잘 하지만, 그런데도 순종은 어려워" 합니다. 매사를 "내 계산대로 되어야 하고, 상식과 관례대로 되어야 한다고 고집도" 부립니다. 그러나 "내가 순종하기 전, 이런저런 생각과 갈등이 있다면, 이미 순종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런데도 순종함에 있음을 기억하고, 어려울수록, 순종에 도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남이 못 보던 것을 보고, 못 듣던 것을 듣고, 체험하지 못한 이적을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렵고 힘들지만, 순종으로 내 영적 그릇을 넓혀가고, 주님의 일하심을 깊이 체험하는 승리가 있기" 원합니다.

 

2. 순종하면, 승리와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 30절에서 "선민은 홍해 주변에서 애굽 사람들이 모두 죽어있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본문 31절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말씀합니다. 당시 "선민이 모세의 순종으로 얻은 은혜는 구원받음과 승리"였습니다. 무려 "400년간 노예로 살았던 선민이 자유인이 되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음은 구원받음과 승리"였습니다.

 

또한 "모세의 순종으로, 당시 최강의 군사 대국인 애굽을 전멸시킴도 구원받음과 승리"였습니다. 저는 "본문의 내용을 쉽게 구원받음과 승리로 표현하지만, 당시 선민에게는 이적과 같은 은혜였을 것"입니다. 성경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라는 말씀에 순종한 모세로 인해, 이처럼 선민이 구원과 승리를 경험했다!" 말씀합니다. 이처럼 "온전한 구원과 승리를 체험했기에, 그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던 선민이 여호와를 경외하였고, 모세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원은 "죽음의 위기를 전제하고, 그 위기와 어려움에서 살아난 은혜를"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 주시는 승리는 일시적, 제한적이기보다, 항상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소중한 구원과 승리를 체험하려면, 더욱 철저하게 순종하라!" 도전합니다. 문제는 "수많은 기독교인 중, 과연 온전한 순종으로 구원과 승리를 체험한 영혼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위축됨은, 불순종해서 구원과 승리를 모르기 때문" 아닐까요?

 

실제로 "하나님 주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악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도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시험문제에서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묻자, 아이가, '그렇게 말입니다.'"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까요?' 묻는데, 철없는 초등학생들처럼 '그렇게 말입니다.'" 답하시겠어요? 오히려 "우리는 이 질문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승리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 날 "캐나다의 삼림 왕인 킵슨에게, 친구가 찾아와서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자네처럼 큰 부자가 될 수 있지?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 큰 부자가 되었나?" 이에 "킵슨은 잠시 생각한 후, 세 가지 비결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술을 마시지 말 것, 둘째 힘써서 부지런히 일할 것, 셋째 하나님을 믿고 모든 일에 의심하지 말 것." 그러자 "친구가 '그런 것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네, 진짜 비밀이 무엇인가!' 다시" 물었습니다.

 

이에 "킵슨은 '누구든지 잘 알고 있어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 명했습니다. 당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어떤 존재인지 너무 잘 아셨지만,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비상식, 비윤리적인 명령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불가능한 명령에 순종해서, 땅과 자손, 복과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은혜를 다시 확인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명하실 때, 우리 수준을 아시고, 내가 순종할 수 있는 것, 순종해야 하는 것만 명령"하십니다. 문제는 "나부터 순종해야 함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할 수 있으면서도, 변명과 핑계로 순종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 수준을 아시는데,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을 요구"하시겠어요?

 

반복하지만, "순종은 절대로 쉽지 않지만, 말씀대로 순종하면 반드시 승리하고, 소중한 간증을 얻고,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내 그릇에 맞게 말씀하심을 믿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삶에서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항상 승리하고 구원의 은혜를 풍성하고 넉넉하게 누려가길" 축복합니다.